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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 보존의 법칙 본문
「에너지는 언제나 평형을 향해 달려간다는 열역학적 통찰이 옳다면, 지식을 통한 사회 변화와 사회 변화를 정당화하는 지식들에도 마찬가지의 유비를 해볼 수 있다. 어느 한 입장이 극단화되면 결과적으로 그 반대의 극단으로 옮겨감으로써 균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혁명은 인간의 평등한 권리를 천명하며 새로운 질서가 태어나게 했지만, 그 혁명의 과정이 빚어낸 무질서는 역설적으로 인간 이성의 계획이 아직은 크게 부족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것은 부르주아의 정치성을 가지고 설명해도 되고,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의 소박성으로 설명해도 된다. 산업혁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는 오늘날의 풍요를 가능케 했지만, 이 풍요는 수많은 사람의 희생을 통해 얻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희생의 메커니즘은 여전히 지구 어딘가에서 작동하는 중이다.
인간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인간의 행동 양식과 사회적 양태를 분석하고 예측하려는 태도의 반대 극단은 인간을 과학적으로 측정 불가능한, 혹은 기계론적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은 목표를 가지고 행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목표가 오롯이 그의 과거로부터 인과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면 모르겠지만, 인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 중에 가장 높은 수준의 자유를 지닌 존재자다.
흥미로운 것은 근대 과학이 인간 이성을 통해 얻은 것 또한 자유였다는 점이다. 과학혁명은 결과적으로 자연을 신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켰고, 근대 철학은 인간의 지위를 낡은 신분제도로부터 해방시켰다. 이때의 해방은 인간의 철저한 자유를 뜻했다. 과학은 인간에게 자연을 지배하는 주인으로서의 자유를 주었고, 근대 철학은 인간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결정할 자유를 주었다. 말 그대로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는 약속의 세속적 구현이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인정하는 순간 순수한 사실에 의지해서 인간을 설명하려는 과학적 인간 이해는 곧바로 어려움에 봉착하고 만다. 칸트의 말처럼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과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여전히 열려 있는 물음이다.」*
16/05/17
* 박승억, <학문의 진화: 학문 개념의 변화와 새로운 형이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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