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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지적 스트레스

모험러

「데이비드 솅크는 풍요로운 전문가의 시대를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전문가 견해의 급증은 전문성이 판을 치는 가상현실적 무정부 상태로 인도했다. 오늘의 뉴스를 따라잡는 것은 다음과 같은 초현실적인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지구가 녹고 있으면서 또한 식고 있다. 원자력은 안전하면서 또한 안전하지 않다. (···) 무제한적 데이터의 시대에는 늘 좀더 많은 수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으며, 그것들을 약간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 반대 입장을 증명해낼 수 있는 기회도 많다. (···) 모든 질문의 모든 측면에 대한 정교한 연구와 주장이 점점 더 많아지면서, 전문적인 지식을 더 많이 가질수록 역설적이게도 점점 덜 명료해지고 있다.


솅크의 '고발'은 우리에게 두 가지 어려운 문제를 일깨워준다. 하나는 지식과 정보의 폭발이 우리에게 안겨주고 있는 새로운 지적 스트레스이고, 다른 하나는 침묵하고 있는 사실의 냉정함이다. 과학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지식과 객관적인 정보는 우리의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정한 목적의 행동을 요구하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주장을 정당화하는 지식과 정보가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이 드물지 않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 옳은지를 결정해주는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결단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다시 말해 기술적 탐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이 모종의 규범적 요구를 정당화하는 사실적 근거로 쓰이기 위해서는 그 둘을 연결시켜줄 고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사실은 그렇게 고뇌하고 있는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실의 냉정함이다. 사실이 스스로 증언하는 법은 없다. 사실은 언제나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올 때만 대답한다. 그래서 사실로 하여금 말을 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 체계다.


과학혁명의 구조적 변동을 고찰한 쿤이 과학적 집단이 받아들이고 있는 신념 체계에 주목했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천동설과 지동설처럼 서로 다른 패러다임이 경쟁할 때 어떤 패러다임을 선택하느냐는 그렇게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 판단 기준 자체가 그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패러다임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패러다임을 비교 선택하는 잣대가 선택될 패러다임들에 의존해 있는 한, 순환성 문제를 피할 수 없다. 그 경우 우리는 객관적인 비교 기준이 없는, 이른바 '통약 불가능성' 때문에 판단의 기준이 사실상 임의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리의 엄정함을 믿는 이들에게 이러한 결론은 결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진리와 지식의 객관성에 관한 근대적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다.」*


16/05/12


* 박승억, <학문의 진화: 학문 개념의 변화와 새로운 형이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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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리뷰, 책 발췌, 낭독, 잡문 등을 남기는 온라인 책방. 유튜브 채널 '모험러의 책방'과 ′모험러의 어드벤처′(게임) 운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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