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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이 차단되는 노예 본문

명문장, 명구절

본능이 차단되는 노예

모험러

「예술 작품의 사회적 무용성은 일단 <원료>로 환원되지 않으면 생산 방식에 있어서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는 자연의 무용성과 상응한다. 예술 작품과 자연의 위상은 옛 힘들의 실추와 자기 보존의 승리, 감각에 대한 지배를 가리키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따르면 이러한 감각의 지배는 육체적 쾌락의 추억과 유혹을 심미적이고 지적인 경험으로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예술 작품의 탄생을 예비한다. 그런데 이 유혹은 폭력적 자기 보존의 몰락을 요청하고 그러한 몰락은 <생산 사회>와 양립할 수 없으므로 멜랑콜리가 되어 버린다. 욕망은 오뒷세우스의 기억 속에 살아남지만 자신을 보호해 주는 이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좌절된다. 이처럼 지배를 유지하고 집행시키는 논리는 사악하다. 자연을 정복하려면 다른 인간들을 예속시켜야 하고, 그 예속은 다시 일반화되어버린 압제의 구실이 된다. 이 압제는 다른 인간들에 대한 예속에서 자기 조건을 찾는 동시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말하는 <본능의 차단>으로 노예를 이끈다. 이 차단은 자신을 세계, 자연, 타인들에 대한 경험에 열지 못하게 하는 전적인 지각의 소외로 볼 수 있다. 그러한 경험은 노예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조건을 참을 수 없게 하니까. 노예는 원료나 재료, 또는 자연의 병적인 모방 그 자체인 기계와 교환 가능한 것으로 전락함으로써 동일자를 재생산한다. 이러한 자아의 투사는 순전히 생물학적인 물질, 다시 말해 죽어 버린 물질에 형이상학적인 이미지를 품는다. 이리하여 대상들을 자신을 압제하는 권력들의 현현으로 보는 노예는 죽음의 경험을 재생산하는 기관이다. 반경험의 순환 조건은 감각과 취향을 사회적 기능이라는 관점에서 포맷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는 유산 계급에게 자기 삶을 지배당함으로써 빚어진 산물, 즉 자신이 향유하지도 못하는 자연에 자신의 노동을 가한 결과를 소비하게 된다. 대중에 의해, 대중을 위해 변질된 이 모든 사물들을 소비함으로써 그는 어떤 질적 경험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이렇게 주인과 노예는 역사적으로, 하지만 어디까지나 지배와 무능을 통해서 인정을 받는다. 주인은 노예의 전적인 무능을 매개 삼아 사물에 대한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정은 상호 부정/희생의 인정이다.」*


15/12/27


* 클로디 아멜, & 프레데릭 코셰. (2014).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오뒷세이아. (이세진, Trans.). 파주: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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