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러의 책방

살아남은 아이 본문

모험러의 잡문

살아남은 아이

모험러
1981년, 쿠데타와 광주학살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대통령은 거리에서 거지들이 구걸하는 꼴이 보이지 않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복지를 할 생각은 없지만, 복지선진국인 것처럼 행세하고는 싶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부랑인 보호시설에 보조금을 지급하기 시작한다. 돈 냄새를 맡은 부산 형제복지원(1975년 설립)의 박인근 원장은 사람 사냥에 나서기 시작한다.

형제복지원은 애건 어른이건 마구잡이로 사람을 포획했다. 국고보조금이 사람 머릿수대로 나왔기 때문이다. 갇힌 이들 중에는 "밤늦게 귀가하던 회사원, 바람을 쐬러 나온 여성, 자갈치시장의 노점상, 농촌에서 흘러든 일용직 노동자, 심지어 국가보안법 위반자"도 있었다. 이들은 영문도 모른체 잡혀와 정신이상자가 되거나 지체장애인이 되거나, 죽었다.

풀려날 수도 없었다. 도망칠 수도 없었다. 갇힌 이들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꽁보리밥에 썩은 젓갈로 배를 채우고 한겨울에도 추리닝 한 벌로 강제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남자들은 늘쌍 개 패듯이 두들겨 맞고, 여자들은 강간당했다. 그렇게 1975년부터 1986년 사이 이 복지원에서 약 513명이 죽었다. 이들은 "굶주려 죽거나 맞아 죽은 것"으로 추정됐다. 죽은 이들 일부는 암매장당했고, 일부는 의학 실습용으로 팔려나갔다. 의사들이 맞아 죽은 게 뻔한 사람을 '자연사'로 진단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태엽 감는 새>에서 "지옥에는 끝이 없다"고 썼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이 지옥은 1987년, 부산의 김용원 검사가 어느 사냥꾼으로부터 산속에 사람들이 짐승처럼 일하는 작업장이 있다는 첩보를 받고 부산형제복지원을 급습하여 끝나게 된다. 

그곳은 하나의 성채였다. 박인근 원장은 왕이었고, 간부와 경비원들은 왕의 시종, 나머지는 모두 노예였다. 형제복지원을 덮친 날, 원장실의 대형금고에는 20억 원이 넘는 각종 예금증서, 달러화, 엔화가 들어 있었다. 박인근 원장은 국고보조금과 무보수 강제노예노동을 통해 "고급 아파트, 골프 회원권, 콘도미니엄 등을 소유하고 단자회사 등에 수십억 원의 예금을 가진 재벌 아닌 재벌"이 되었던 것이다.

김용원 검사는 박인근 원장이 10억 원 이상을 횡령한 사실을 근거로 무기징역을 구형하고 싶었지만, 검찰총장 등 '윗분들'의 압력으로 형량과 횡령액수를 축소해야만 했다. 1심 재판에서 박인근 원장은 징역 10년과 벌금 6억여 원을 선고받았다. 1차 항소심에서 벌금은 사라지고 징역은 4년으로 축소되었다. 2차 항소심에서 그것은 3년이 되었다. 3차 항소심에서는 징역 2년 6월로 더 줄어들었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진 직후 전두환 대통령은 송구스러워하는 부산시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박 원장은 훌륭한 사람이오. 박 원장 같은 사람 덕분에 거리에 거지도 없고 좋지 않소." 

2년 6개월 만에 풀려난 박인근 원장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여전히 사회복지계의 왕이다. 그가 세운 법인은 이름만 바꿔 '사회복지법인 형제복지지원재단'이 됐다. 박 원장은 2011년까지 이 재단의 이사로 활동하다 지금은 아들에게 대표이사자리를 넘겼다. 2008년에는 '대안학교'(!)인 신영중·고교의 대표이사로 취임한 뒤, 2010년 그 자리를 딸에게 넘겼다. 

아무 이유 없이 형제복지원에 강제로 끌려가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다가 몸과 정신이 파괴되고 삶을 잃어버렸던 수천 명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아무런 보상도, 재활도 받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피해보상을 받을 방법도 없다. 형제복지원이 폐쇄될 때 그들이 가장 먼저 없애버린 것이 바로, 형제복지원 입소 자료였기 때문이다. 피해를 입증할 증거자료가 사라진 것이다. 지옥에는 끝이 없다.

그 지옥에서 살아남은 한 사람이 책을 내었다. "들어주세요. 우리 얘기를 들어주세요"라고. 이름은 한종선, 올해 서른아홉이 되었다. 책 제목은 <살아남은 아이>. 우리는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13/03/21

* 오마이뉴스, 13-03-19, <인간이 만든 지옥, 그곳이 '형제복지원'>;
한겨레, 13-02-09, <‘누나는 성폭행·아빠는 정신병원’ 살아남은 아이는 묻는다>;
오마이뉴스, 13-01-29, <그곳에서 513명이 굶어죽고 맞아죽었다. 수사검사도 분노한 김용준 '형제복지원' 판결>;
형제복지원 피해자의 블로그(blog.daum.net/natwva);
한종선 외, <살아남은 아이> 등을 참조하여 씀.

'모험러의 잡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벚꽃과 사진을 찍다  (0) 2013.03.29
왕양명 선생의 깨달음  (0) 2013.03.25
노란 꽃  (0) 2013.03.24
깨달은 세대  (0) 2013.03.19
매화 향기  (0) 2013.03.18
정신의 거처  (0) 2013.03.17
설 연휴, 버스터미널에서  (0) 2013.03.13

모험러의 책방

서평, 리뷰, 책 발췌, 낭독, 잡문 등을 남기는 온라인 책방. 유튜브 채널 '모험러의 책방'과 ′모험러의 어드벤처′(게임) 운영 중.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