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러의 책방
젊은 소설가의 고백(움베르토 에코 가상 인터뷰) 본문
1. 어째서 당신이 '젊은' 소설가인가?
내 나이 일흔일곱이지만 소설가로 입문한 것은 고작 28년 전으로 나는 매우 젊고 전도유망한 소설가이다. 앞으로도 50년 동안 훨씬 더 많은 책을 써내려갈 것이다.
2. 창조적 소설가의 특징은 무엇인가?
삶의 모순들을 펼쳐놓고 해답을 찾아보라고 주문할 뿐 공식을 정해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때로 소설가는 철학자가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한다.
3. 논문은 꼭 따분해야 하는가?
오히려 어떤 학문이라도 일종의 추리소설, 즉 어떤 종류의 성배를 찾는 탐구 보고서처럼 써야 한다.
4. 왜 소설을 쓰기로 마음 먹었는가?
그러고 싶은 충동을 느껴서.
5. 어떻게 소설을 쓰는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6. 좀 더 친절하게 답해 달라
첫째, '영감'이란 약삭빠른 작가들이 예술적으로 추앙받기 위해 하는 나쁜 말이다. 고치고 또 고치고, 연구하고 또 연구하라.
둘째, 소설은 단지 언어의 조합이 아니다. 서사는 '주제를 고수하면 언어는 따라온다'. 반대로 시는 '언어를 고수하면 주제는 따라온다'. 서사는 우주가 탄생하는 사건.
7. 글을 쓸 때 상세한 아이디어나 계획을 갖고 시작하는가?
아니다. 하나의 심상에 지나지 않는 단초적인 아이디어에서 시작한다. '장미의 이름'은 수도원의 깊은 적막과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스며드는 몇 가닥 빛줄기에 전율한 어린 시절의 심상에서 시작됐다. 거기서 독살 당하는 수도사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나머지는 그 심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와중에 뒤따랐다. 또, 서사 세계의 구조가 소설의 문체를 결정했다.
8. 다른 비법들은?
성공할 수 있는 소설을 쓰려면 어떤 비법들은 비빌에 부쳐야 한다.
9. 이중코드 기법이란?
지적인 독자들에게는 은밀한 도발과 영감, 쾌감을, 그리고 일반 독자들에게는 이야기의 맛을 주는 기법. 문학의 목적이 오로지 즐기고 위로하는 것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좋은 문학은 독자들이 내용을 이해하고자 같은 책을 두 번 세 번씩 읽게 된다. 독자들의 지성에 경의를.
10. 해석자의 권리는 무한한가?
그렇지 않다. 최근 해석자의 권리는 지나치게 강조됐다. 텍스트에게도 권리가 있으며 해석의 범위도 축소된다. 텍스트는 (잠재적으로 무한히) 열려 있을 수 있지만 모든 해석이 유의미한 것은 아니다. 어떤 해석이 잘 된 해석인지 판단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분명 좋은 해석과 억지스러운 해석은 나뉜다.
11. 텍스트는 누구를 염두해 두는가?
모델 독자다. 무조건 옳은 추측을 하는 건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텍스트의 의도와 일치하는 모델 작가를 이해하고자 추측하는 독자들. 게임에는 규칙이 있고 그런 규칙을 존중하여 게임에 열렬히 참가하는 사람들이다.
경험적 독자: 텍스트를 열정을 위한 매개체, 즉 텍스트 외적으로 발생한 열정이나 그 텍스트가 불러일으킨 열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이용한다.
모델 작가: 텍스트의 의도를 만든다.
경험적 작가: 경험적 인간으로서, (본인이 썼더라도) 텍스트의 모든 의도를 다 알아차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저자의 의도와 텍스트의 의도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그래서 때로는 독자를 통해 자신도 미쳐 몰랐던 사실들을 깨닫기도 한다. 그래서 창조적 작가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들을 존중해야 한다. 그것은 병 속에 넣어 바다에 띄운 편지처럼 세상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텍스트는 내 손을 떠났다. 어쩌면 독자들이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비경제적인 해석을 거부할 권리도 있다.
경험적 작가의 사사로운 삶은 경우에 따라서는 텍스트보다 더 알기 어렵다. 텍스트를 창작하는 알 수 없는 과정과 통제를 벗어나 표류하는 미래의 해석들 사이에서, 텍스트는 '텍스트로서' 여전히 위로가 되는 존재이자, 우리가 굳게 고수할 수 있는 요소이다.
12. 현실 세계에서 수백만 인구(아이들을 포함하여)가 기아로 사망하는 상황에는 별로 불행해하지 않으면서, 베르테르나 안나 카레니나의 죽음에 크게 비통해하는 건 도대체 무슨 경우인가?
뒤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사학자들은 유령에 지나지 않는 인물을 환기시키지만, 소설가들은 살과 피를 지닌 사람을 창조한다."
이야기는 '가능 세계'(possible world)이자 '작은 세계'(small world)이다. 가능 세계의 인물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대상'(physically existing object)은 아니지만, 허구 세계는 현실 세계에 기생하고 있다.
그렇다고 나는 '텍스트주의자'는 아니다. 일부 해체주의자들이 그러하듯 사실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해석이, 즉 텍스트가 존재할 뿐이라고 믿는 사람이 아니다. 어떤 해석이든 시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석되어야 할 어느 정도의 사실이 있어야 한다.
현실의 인물들은, 그 존재의 근본적인 면들은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허구의 인물들의 속성은 텍스트의 서사 안에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읽을 때마다 우리는 그를 조금씩 더 알게 된다.
역사적 사실에 관한 모든 주장은 언제나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허구적 사실에 관한 주장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예를 들어, 셜록 홈즈가 말하는 왓슨은 늘 동일 인물이다. 최소한 텍스트는 그렇게 암시한다. 허구적 텍스트는 서사 세계 안에서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를 말해줄 뿐 아니라, 무엇이 의미 있는지, 혹은 무엇을 무시해도 좋은지까지도 보여준다.
히틀러가 베를린의 벙커에서 죽었는지로는 논쟁할 수 있지만, 클라크 켄트가 슈퍼맨이라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물론 허구적 사실들에 부동의 진리가 존재한다고 그것이 그들의 시련에 흐느껴 우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정한 허구적 등장인물들은 원작과도 독립적인 일종의 존재감을 획득한다. 많은 허구적 등장인물들이 그들에게 존재를 부여했던 작품 밖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범위를 정하기가 굉장히 힘든 보편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중 어떤 등장인물들은 텍스트에서 텍스트로 옮겨 다니기도 한다. 우리가 집단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수세기 동안 그들에게 감정을 투사하고, 그 인물들을 '변이적' 개체로 변형시켰기 때문이다. 이들은 생명을 얻어 우리의 부락에서 함께 살아간다.
텍스트와 자신들이 태어난 가능 세계에서 독립한 이 인물들은 (말하자면) 우리 사이를 돌아다니는 중이고, 우리는 그들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쉽게 생각하지 못한다. 그렇게 우리는 이 인물들을 자기 삶의 모델로서뿐 아니라 타자의 삶의 모델로까지 받아들인다.
매혹적으로 마음을 사로잡는 서사 세계에 들어갈 때, 우리는 텍스트 전략에 따라 일종의 신비한 '황홀경'이나 환영 같은 것에 빠져들고, 가능 세계에 지나지 않는 곳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간단히 망각하기도 한다. 이런 일은 특히 원작이나 매혹적인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만날 때 일어난다. 하지만 이 인물들은 변이를 겪으면서, 말하자면 우리 머릿속을 들락날락하기 때문에, 언제든 최면을 걸듯 쉽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자신들이 우리 같은 사람이라고 믿게 만든다.
그들 행위의 불변성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특정한 속성들을 보유하고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했다는 말이 참이라고 언제든 주장할 수 있다. 클라크 켄트는 지금도, 그리고 언제까지고 슈퍼맨인 것이다. 윤리적 관점에서 허구적 등장인물들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원론적으로 우리는 오이디푸스 신화와 '햄릿', '폭풍의 언덕', '전쟁과 평화', '죄와 벌', '변신', 그리고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다시 쓸 수 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하고 싶은가?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햄릿과 로버트 조던, 그리고 안드레이 공작은 죽는다. 독자가 책을 읽으면서 무엇을 갈망하건, 혹은 무엇을 희망하건 상관없이, 그 일은 어떻게든 일어나고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깨닫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경험 때문에 우리는 운명의 손길을 느끼며 전율한다. 위대한 비극이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갖는 이유는 주인공들이 극악한 운명에서 도망치는 대신, 제 손으로 팠던 극악한 심연 속으로 뛰어들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하는 이유는 자기 앞에 놓인 운명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맹목적으로 달려간 곳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우리는 또렷이 볼 수 있지만 그들을 막지는 못한다.
허구적 등장인물들은 불완전한 세계, 혹은 좀 더 불손하게 말해서 '불구'의 세계 안에 산다.
하지만 그들의 운명을 정확히 이해하면서, 우리는 현실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도 빈번히 이러한 운명에 직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허구적 등장인물들이 그들의 세계를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사는 세계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우리의 실질적 세계관이 허구적 등장인물들의 세계관만큼 불완전할지도 모른다고 암시한다. 바로 이 때문에 유명한 '허구적' 등장인물들은 '사실적' 인간 조건의 최고의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13.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읽고 쓰는 즐거움. 이것이 바로 젊은 소설가의 고백이다.
17/01/03
* 움베르토 에코, '젊은 소설가의 고백'에서 발췌, 재구성. 서평. 리뷰. 요약.
2016/12/30 - 소설가가 되고 싶은가?(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2017/01/01 -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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