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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 접촉과 공간의 공유가 쓸모없어질까? 본문
「가다머(Hans Georg Gadamer)가 『진리와 방법』에서 지적해 유명해진 대로 상호이해란 '지평들', 즉 인식 지평들의 '융합'으로 촉발된다 ― 이 지평은 삶의 경험이 축적되는 과정에서 생겨나고 확장된다. 상호이해가 요구하는 '융합'은 공유된 경험의 소산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은 공간의 공유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가다머의 가설에 대해 마치 다량의 경험적 증거를 제공하기라도 하듯 사업상 여행을 자주하는 사람들이나 지금 막 등장 중인 전 세계를 누비는 엘리트 또는 '글로벌 지배 계급'들이 직접 얼굴을 마주보고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 또는 같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거나 같은 바에서 한잔하는 것처럼 단순히 공간을 함께 이용하거나, '어울리거나', '함께 지내거나' 하기 위해 ― 마련된 공간들(초국적인 호텔이나 회의장의 세계적인 체인 같은 공간)은 문화적·언어적·종파적·이념적 또는 그 밖의 다른 차이들 ― 만약 그러한 공간들이 아니라면 이들은 서로 갈라졌을 것이며, '우리는 하나'라는 정서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 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엘리트들의 통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실로 상호 이해의 발전 그리고 그러한 이해를 위해 필요한 삶의 경험의 공유야말로, 전자적으로 훨씬 더 빠르고 또 훨씬 덜 번잡하고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의사소통할 수 있는 장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업가나 학자들이 계속 여행하며 서로를 방문하고 회의석상에서 만나는 유일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의사소통이 정보 전달로 축소되고 어떠한 '지평들의 융합'도 요구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터넷과 월드와이드웹(www) 시대에 물리적 접촉과 공간이나 경험의 공유는 (잠깐의 일시적인 것일지라도) 쓸모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았으며, 지금까지는 아무것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지 않다.」*
15/10/19
* 지그문트 바우만. (2013). 리퀴드 러브. (권태우 & 조형준, Trans.). 새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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