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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와 상처입을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사랑도 할 수 없다 본문
「조너선 프랜즌(Jonathan Franzen)은 <상처를 향해 돌진하라>*라는 제목의 글에서 기술 소비주의(techo-consumerism)가 만들어내는 인간관계란 위험을 회피하고자 하는 겁쟁이들이 만들어낸 자기기만적인 가짜 세계라고 비판합니다. 기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기껏해야 안락과 편의일뿐, 우리는 기술이 주는 친절한 반응들과 힘들이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편안함에 서서히 길들여지는 것이죠. 기술은 소비자이자 사용자인 우리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하여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니까요. 우리 모두의 소망이란 결국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일 겁니다. 그리고 기술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그것을 제공해주지요.
프랜즌의 지적은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페이스북의 '좋아요' 버튼을 누르는 행위는 이제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기보단 컴퓨터 마우스로 행하는 하나의 실천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느낌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소비자적 선택의 결단으로 변모하였다. 그리고 '좋아요' 버튼은 이제 사랑에 대한 상업문화적 대체물이 되었다."
이렇듯 명령어에 따라 그대로 작동하고,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움직이기만 해도 모든 것이 실행에 옮겨지는 전자 기기들은 결코 진정한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르시시즘이라는 환상에 기반을 둔 자기기만을 양산합니다. 즉, 현실의 고통이나 위험으로부터는 자신을 보호하면서, 스스로를 현실에 투영하여 모종의 우월감을 느끼는 가식적인 관계맺음을 가능케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한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사랑을 한다는 것은 이런 모습을 띠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음을 다하는 헌신과 자기희생의 의지를 포함하지요. 불확실성 속에서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결단이 그 안에 있는 겁니다. 이것은 나의 자존심과 아집을 버리고 타인과 나의 삶을 공유하고자 하는 희망과도 같습니다. 또한 실패의 가능성과 상처 입을 가능성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프랜즌의 말처럼, 여기서 우리는 "기술의 나르시시즘적 경향"과 "실제 사랑의 문제"가 상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 사랑은 나르시시즘의 해독제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우리의 자존심이 실제 사랑의 세계에 발을 뻗지 못하고 가식의 보금자리에 스스로를 가두려고 할 때, 사랑은 바로 그 가식이 그릇된 것임을 폭로하는 최고의 내부고발자 역할을 해줄 것입니다.」**
15/08/06
* Jonathan Franzen, "Liking Is for Cowards. Go for What Hurts," The New York Times, 2011. 5. 28. ("'좋아요'는 겁쟁이를 위한 것이다. 상처를 향해 돌진하라.")
** 인디고 연구소(InK) 기획. (2014). 희망, 살아 있는 자의 의무: 지그문트 바우만 인터뷰. 서울: 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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