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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러의 책방
「이러한 토대 의존 관계를 확장하면 우리는 일련의 계열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즉 한 파생세계가 의존하는 토대세계가 다시 그 어떤 토대세계의 파생세계인 경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토대세계의 계열을 상정할 수 있다면, 가장 근원적인 토대가 되는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후설에 따르면, 환원되지 않는 파생세계들이 자신의 존재를 의지하고 있는 토대 세계는 바로 '이' 세계, 즉 생활세계다. 후설이 생활세계를 모든 관념적 세계의 의미 토대로 간주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생활세계야말로 우리의 직관적인 경험에 가장 먼저 주어지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 발생적 뿌리에 파생세계로서의 모든 관념적 세계가 의지해 있는 것이다. 그 경우 무엇이 '이' 세계의 본질적 속성인지는 기술적 탐구를 통해 확정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생겨난 파생종들이라도 하나의 독립된 정체성을 지닌 개체들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면, 그것도 여전히 하나의 자연종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무엇이 고유한 정체성을 규정하는가이다. 생물학적 의미의 종species 개념은 형태학적, 혹은 생태학적, 유전학적 개념으로도 사용된다. 이런 점에 비추어보면 어떤 일군의 개체들이 고유한 형태학적 특성과 생태적 특성을 공유하고, 유전적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면 하나의 '종'으로 불릴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물리적이고 자연적인 세계와는 다르다고 여겨지는 문화의 세계나 예술의 세계는 파생종이기는 하지만 분명한 하나의 자연종이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문화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함께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 세계다. 우선 우리가 살고..
「우리가 흔히 실제로 의미 있게 사용하는 개념으로서의 '세계'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전체'라는 형식논리적 개념보다는 특정한 범주로 묶어서 통일성을 줄 수 있는 영역적 개념이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질적 차별성을 지닌 영역으로서의 세계들의 모임은 '세계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그런 세계들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해명하는 작업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예컨대 후설은 그런 세계들이 서로 대등한 관계에 있다고 본다. 즉 각각의 세계는 논리적으로 독립적이다. 그래서 실제 우리 주변의 '자연적인 세계'와 '가치의 세계' '정치의 세계'와 같은 관념적인 세계들, 즉 "동시에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이 두 세계는, 그 세계들이 모두 나와 관련 있어서 내가 자유롭게 내 시..
「우선 후설은 당대 학문의 상황을 '위기'로 진단한다. 그리고 그 위기는 근대 철학의 잘못된 문제 설정 때문이라고 규정짓는다. 그 문제설정이란 의식의 영역과 대상의 영역을 교량 없는 두 세계로 구분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결국은 우리가 경험되는 이 세계를 하나의 수수께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후설에 따르면 우리의 의식과 대상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본질적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 즉 우리 의식은 언제든지 그 어떤 '무엇', 즉 대상을 향해 있고, 우리에게 대상으로 주어지는 모든 것은 그런 의식의 매개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대상으로 주어질 수 없다. 후설은 이를 의식의 지향성이라고 말한다. 이 지향성이야말로 인식 대상이 대상으로서 주어지는 인식의 수수께끼를 푸는 실마리다. 후설의 전략은 명료했다. 근대..
「자연과학과 기술과학이 자신들이 생산한 위험을 처리하면서 '현실성 위기'에 빠지는 것도 기술자와 과학자가 소유한 위험 진단에 대한 독점권을 위태롭게 만드는 또 다른 요인이다. 안전하다는 것과 '십중팔구 안전할 것이다'라는 것 사이에는 천양지차가 있다는 것이 체르노빌 이후에야 통용되는 진리는 아니지만, 이제는 거의 모든 사람이 경험할 수 있다. 기술과학은 항상 개연적인 안전에 대한 재량권만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그 진술은 설령 내일 두세 기의 핵발전소가 폭발해도 여전히 진리로 남을 것이다. [울리히 벡, 『글로벌 위험사회』 중] 정량적 계산이 주는 신뢰감은 그런 정량적인 평가가 객관적일 것이라고 믿는 우리의 태도에서 나올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객관성이라는 버팀목에 의지해서 도덕적으로는 다소 무책임한 ..
「하버마스가 힘주어 말했듯이 계몽은 '미완의 기획'이었을 뿐이다. 분명히 1890년대의 주요한 지적 혁신자들은 인간 행동의 비합리적 동기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비논리적인 것, 비문명적인 것, 설명할 수 없는 것의 재발견에 사로잡혀 있었고 거의 심취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비합리주의자'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위험할 만큼 애매하다. 이것은 무의식의 영역에 대한 관용, 심지어 편애까지도 암시한다. 사실은 그 반대가 진실이었다. 1890년대의 사회사상가들은 비합리적인 것을 제거하기 위해 비합리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다. 비합리적인 것에 천착함으로써 그들은 이를 길들여 인간의 건설적인 목표를 위해 사용하려고 했다. 조르주 소렐과 빌프레도 파레토 그리고 에밀 뒤르킴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같은 혁신자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