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이데올로기 (12)
모험러의 책방
「이런 모든 개탄의 와중에 프랜시스 후쿠야마 자신도 역사의 종착점에 놓인 삶에 관해 극심한 양가감정을 보였다는 점은 잊히곤 한다. 그의 논문에 담긴 우울한 어조의 마지막 문단은 통째로 인용할만한 가치가 있다. 역사의 종언은 매우 슬픈 시간이다. 인정을 구하는 투쟁, 순수하게 추상적인 목적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거는 자세, 대담성·용기·상상력·이상주의를 촉구하는 전 지구적 이데올로기 투쟁은 경제적 이해타산, 끊임없는 기술문제의 해결, 환경에 대한 우려, 까다로운 소비자의 수요 충족에 자리를 내줄 것이다. 탈역사의 시대에는 예술도 철학도 없고 그저 인류 역사를 담은 박물관을 영원히 관리하는 일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나는 스스로의 내면에서,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서, 역사가 존재했던 시절에 대한 강한 향수..
「에너지는 언제나 평형을 향해 달려간다는 열역학적 통찰이 옳다면, 지식을 통한 사회 변화와 사회 변화를 정당화하는 지식들에도 마찬가지의 유비를 해볼 수 있다. 어느 한 입장이 극단화되면 결과적으로 그 반대의 극단으로 옮겨감으로써 균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혁명은 인간의 평등한 권리를 천명하며 새로운 질서가 태어나게 했지만, 그 혁명의 과정이 빚어낸 무질서는 역설적으로 인간 이성의 계획이 아직은 크게 부족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것은 부르주아의 정치성을 가지고 설명해도 되고,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의 소박성으로 설명해도 된다. 산업혁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는 오늘날의 풍요를 가능케 했지만, 이 풍요는 수많은 사람의 희생을 통해 얻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희생의 메커니즘은 여전히 지구 어딘가에..
「그런데 이러한 시인의 소명이 사회학자의 소명과 관련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학자들은 시를 거의 쓰지 않는다(우리 중에는 직업상의 일들로부터 안식년을 내어 글을 쓸 시간을 갖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 해도 우리가 '가짜 시인'처럼 되는 것이 싫거나 '가짜 사회학자'가 되는 게 화가 난다면, 우리 역시 숨어 있는 인간의 가능성들을 발굴하는 진짜 시인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해야만 한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명백하고 자명한 진실들의 벽, 오늘날 지배적인 어떤 이데올로기가 그것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그 지배의 합당함을 입증 받는다면, 바로 그 이데올로기의 벽을 파고들어야 한다. 그러한 벽들을 허무는 것은 시인의 소명일 뿐 아니라 사회학자의 소명이기도 하다. 가능성들 앞에 ..
「경제와 금융 분야에서 동문들의 인맥, 제도화된 성차별, 여성의 과소대표가 문제이긴 하지만, 이것들은 그 자체로는 경제체계의 재균형을 방해하는 주된 장애물이 아니다. 진짜 장애물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주류 경제이론이다. 이것은 복잡성을 단순한 법칙으로, 인간의 동기를 차가운 계산으로 환원시키는 세계관이자 사고방식이다. 줄리 넬슨에 따르면 경제학은 '초연함, 수학적 추론, 형식성, 추상'이라는 남성적 방법론을 '연결성, 언어적 추론, 비형식성, 구체적인 세부사항'이라는 여성적 방법론보다 높이 평가한다. 경제학은 물리학처럼 불편부당하고 초연하며, 단단한 과학이 되려고 노력해왔지만 (부분적으로는 바로 그 때문에) 결국은 특정한 양성의 행동을 승인하고 축복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비선형성, 유동성, 복잡한 상호의..
「주류 경제학에서 아이러니한 점은 합리적 경제인에 대한 이상이, 실제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반대 증거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리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무리수가 유리수보다 더 많고, 직선보다 곡선을 그리는 방법이 더 많은 것처럼, 합리적인 방식보다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경우의 수가 더 많은데 말이다(종종 경제학자들은 그 경우의 수를 다 헤아리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주류 경제학자들의 이런 완강함은 부분적으로 행동심리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소유 편향, 손실 회피, 변화에 대한 저항 등의 개념을 빌려서 말이다. 우리는 소중한 보물에 집착하듯이 이념에 얽매인다.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고 교육받은 경제학자들은 이 아이디어가 실제로는 쓸모없는 멍청한 생각이라는 걸 받아들이기..
「1. 경제는 불공정하다. 경제학 이론의 목적은 한정된 자원의 최적화된 분배에 있다. 하지만 현실은 부익부 빈익빈이다. 2009년 어떤 헤지펀드 매니저는 20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는데, 당시 하루에 1달러를 벌기조차 힘든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은 자원을 분배하는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말해주는 사례다. 2. 경제는 불안정하다 주류 경제이론에 따르면 '보이지 않는 손'은 자산 가격을 안정된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석유, 금, 그리고 경화를 포함하는 자산은 거대한 요동 상태에 있다. 2007년 하반기에 석유 가격은 불과 몇 달 사이에 1배럴에 140달러까지 치솟았다가 40달러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기름을 흔히 '경제의 혈액'이라고 하는데, 실제 환자들을 위한 혈액은행의 공급은 이보다..
「합리적 기대. 아마 경제학에서 어떤 개념도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기초해 이처럼 분명하게 모든 다른 가능성을 거부하고, 경제적 현상을 평형의 개념 상자 안에 밀어 넣으려는 충동적인 욕망을 드러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욕망은 어떤 과학적 관점에서도 전적으로 기괴하게 느껴지지만 사회학적인, 또는 인간의 행동이라는 관점에서는 그나마 덜 기괴하게 느껴진다. 경제학이 자신들이 과학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를 지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가두어 버리는 것과 같을 것이다. 아시의 실험에서 사회적 동조에 대한 압력이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로 짧은 선을 더 긴 것처럼 보게 할 수 있었듯, 경제학자들 역시 실험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합리적 기대 모델이, 실제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고 믿게 되었을 수 있다...
「[맹자가 집중執中에 대해 말하면서 무권無權은 집일執一과 같은 것이라고 한 것에 대한 설명] 진리는 변하는 것이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역易, 수시변隨時變의 뜻이다. 아까 질문의 집중, 무권이라 할 때 '권權'은 저울 권 자로서 저울이라는 것은 올려놓는 물건에 따라 자꾸 변하는 것이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저울추가 무게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이것을 '시중時中'이라고 한다. 그때그때에 따라 자꾸 변하는 것을 말한다. 옛날 저울로 무게를 잴 때 저울추로 무게에 따라 눈금을 꼭 맞추는 것, 그것이 '시중'이다. 그때그때 적절하게 맞아 들어가야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저울이 물건에 따라 무게가 달라지고 의사의 진찰이 환자의 병세에 따라 달라지듯이 진리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에 따라..
「인간은 사상 주변으로 모여든다. 사상이 문제의 해결과 통제의 환상이라는 생물학적 축복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사상이 초유기체의 거대한 네트워크에서 인간을 묶어 놓고, 흩어진 개인들을 융합시켜 무서운 힘을 지닌 협력적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우호와 공조라는 위안감을 통해 인간을 밈의 세력으로 끌어들이려는 하나의 유인책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다른 사회 집단으로부터 힘과 자원을 빼앗으려는 고매한 가면이기도 하다. 그것은 밈, 다시 말해 다른 이의 몸체를 먹고 살찌는 사상의 집합이다. 이데올로기는 패배자를 새로운 서열의 위치로 몰아넣는 횃불로 작용한다. 밈의 거미줄은 밑바닥 사람들의 굴종을 정당화하여 정상의 권세를 지지하고, 때로는 특화된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변화 없는 사회를 만든다. 정치..
「현상윤은 해방된 이후 『조선유학사』를 쓰면서 그 마지막에 '유학의 죄'를 몇 가지 적어두었다. 1) 문벌을 중시하여 인재를 경시하고 계급을 고착시킨 점. 2) 가족공동체의 결속과 화해를 강조한 나머지, 배타적 가족주의로 흐른 점. 3) 당쟁의 격화로 하여 학문적 대화와 토론이 막히고, 국정에 있어서도 공정하고 건설적인 제안이 채택되기 어려웠다는 점. 4) 무武, 즉 국방과 군사를 경시하고 문약에 흐른 점. 5) 가난을 자랑하고 상공업을 천시한 점. 이리하여 한말에 이르러 풍속은 무너지고, 국정은 문란하여, 강자가 약자를 수탈하는 무도가 일상화되었다. "나라가 있으되 주인이 없고, 주인은 있으되 국민이 없었다. 국민은 또한 원수와 도적뿐인데다 무지하고 유약하고, 나태하고, 신뢰가 없어 국맥을 유지하고 외..
어제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실현 가능성'에 대한 공방이다. 나는 이런 공상을 해보았다. 박근혜 후보 지지자는 문재인 후보의 보편 복지와 경제민주화가 실현 불가능해 보인다. 문재인 후보 지지자는 이정희 후보의 무상의료, 무상교육과 재벌해체가 실현 불가능해 보인다. 이정희 후보 지지자는 김순자 후보의 전 국민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이 실현 불가능해 보인다. 김순자 후보 지지자는 김소연 후보의 재벌몰수와 주요산업 사회화가 실현 불가능해 보인다. 만약 녹색당 후보가 있었다면 김소연 후보 지지자는 녹색당 후보의 탈산업화와 지역공동체주의가 실현 불가능해 보였을 것이다. 반대로 녹색당 후보 지지자는 김소연 후보의 대안이 물질주의적이고 산업주의적이어서 근본적 대안이 아니라고 느낀다. 김소연 후보 ..
무엇으로 치장해도 관계가 맺어지고 나면 진짜 모습은 금방 드러난다. 밀러는 말한다. "장기적으로는 누구도 속일 수 없다." 그래서 리영희 선생은 친구를 알려면 적어도 20년은 사귀어 보아야 한다고 했다. 눈이 와봐야 솔이 푸른 줄 알기 때문이다(http://anatta.tistory.com/65). 「진화심리학이 전달하는 핵심 메시지는 이것이다. 우리 삶에서 가장 귀중하고 복합적이고 복잡하고 놀라운 것은 모든 인간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생물학적 적응, 특히 개인차를 과시하는 적응들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동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갖고 있지만, 인간의 주요 이데올로기들은 다 같이 공모해 우리가 이 사실을 잊도록 만들고 있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우리에게 사회적으로 승인받고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