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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러의 책방
"근대의 이상은 예술에 양식을 두고, 방법은 과학에서 찾는다. 시인들의 어마한 환상, 즉 사회의 아름다움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은 과학의 힘이다. 인간은 A+B에 의해서만 에덴동산을 다시 세울 것이다. … 꿈도 계산의 힘을 보여야 한다. 예술은 정복자이지만, 그것은 과학이라는 보행자에게 기대지 않으면 안 된다." -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 더클래식
「일반인과 전문 학자들은 환경론적 신비감과 물질적인 삶에 대한 혐오에 경도되어 부족집단들을 에덴 동산의 선량한 인간으로 보고 싶어한다. 한마디로 문명인들은 부족민들이 의롭고, 영적(그들 스스로가 아닌 현대인의 관점에서)이며, 보다 행복하고, 심리적으로 복잡하지 않아 이기적인 계산을 할 가능성이 적은 사람들이기를 원한다. 몇몇 사례를 제외하고는 지난 수세기 동안 서양인들은 선사·원시부족들이 현대인만큼이나 꾀가 많고 도덕에 선택적이며 심리적으로 복잡다단한 인간들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하지만 원시·선사부족들에게 장점만 가져다 붙이면서 단점 보기를 거부하는 것은 문명인 스스로만큼이나 그들을 비인간화시키는 것이다.」* 14/08/05 * 로렌스 킬리, 에덴동산 원시사회
「이들과 환경운동의 이데올로기적 주도권을 다투는 사람들이 자칭 근본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이 사회를 기술 이전의 중세주의와 금욕주의로 몰고 가려고 한다. 그들은 생태신학자들이며 그들의 일부 견해는 종교적 과격파의 사고방식과 연결되어 있다. 이 생태 신학자는 환경오염에 대한 기술적 구제방법이 없으므로 인간은 산업주의 이전의 빈곤상태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도록 운명 지워져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전망을 저주가 아닌 축북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들은 중세 이후 자취를 감췄던 종교적 세계를 부활시키고자 한다. 환경보호운동은 이를 위한 편리한 수단일 뿐이다. ...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최초에는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살면서 자연을 숭배했던 생태적 황금시대가 있었다. 산업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인류는 에덴동산..
* http://youtu.be/9Rhvxy0r2Do "생각해보면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상태는 두 단계 밖에 없어요. 제일 처음인 '무의식적 무지'와 마지막인 '무의식적 앎'. 즉, 처음 레벨을 벗어나면 행복하게 음악을 하기 위해서는 결국 마지막까지 가는 수 밖에 없어요." - 영상 중 위의 강의는 음악 외의 분야에도 적용될 뿐 아니라, 의식 일반에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인간은 아직도 에덴동산 안에서 의식이 행복하게 잠들어 있는 짐승과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 지복(bliss) 상태에 있는 신 사이 어디쯤 있다. 그래서 인간의 '간'자가 '사이 간間'자인 걸까? 괜히 니체가 사자의 단계를 넘어 인간 의식의 최종 단계를 어린아이로 비유한 게 아니다. 그러나 합리적인 의식과 이성에도 도달하지 못한 무지의 단계..
「지난 50년간 선사시대 전쟁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전쟁 자체가 드물었고 설사 일어난다 해도 심하지 않았으며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그러나 로렌스 H. 킬리의 《원시전쟁(War Before Civilization : The Myth of The Peaceful Savage)》은 기존의 안일한 허상에 대해 강력한 반론을 제기함과 동시에 원시사회의 전쟁이 문명세계의 접촉으로 비롯되었다는 관념을 부숴버렸다. 로렌스 H. 킬리는 고고학적.역사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근대 유럽 국가에서 북아메리카 대평원 인디언 부족사회까지 문명세계와 원시사회의 전쟁을 날카롭게 비교.분석하였다. 그 결과 원시전쟁이야말로 현대의 전쟁보다 훨씬 더 빈번하였고, 잔인하면서도 치명적이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세계 ..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즉 지위도 필요하고 섹스도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수렵·채집이 원시적 농업보다 호구지책의 기술로 훨씬 나은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그런데 수렵·채집 방식의 우월성에 대한 주장이 애초에 그릇되거나 적어도 과장된 것임이 드러난다면 농업을 뒷받침하는 논리는 더욱 강력해질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 주장은 잘못된 것이거나 과장된 것일 수 있다. 쿵족의 노동시간에 대한(하루에 두세 시간 일하고 나머지는 여가 시간이라는) 초기의 계산을 엄밀하게 재조사해본 결과 결함이 발견되었다. 노동 시간을 계산한 사람들은 음식을 가공하고, 창을 만드는 것과 같은 활동을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이 수렵·채집인들은 적어도 원예사회의 구성원들만큼 힘들게 일하는 ..
「'생명의 그물' 이론가들은 통상 존재의 평등성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깨달음에 도달한 홀라키를 놓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개미와 원숭이 모두 '절대신성'의 완벽한 현현이므로 ― 실제로 그들은 그렇지요 ― 그들 사이에는 깊이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가장 골치 아픈 형태로 된 환원주의적 주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시대의 환경윤리학이 '영'의 현현으로서의 모든 홀론을 예외 없이 존중하기를 바라지만 또한 동시에 그 내재적 가치성에 대한 실용적 구분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원숭이보다는 바위를 걷어차는 게 훨씬 더 낫고 암소보다는 당근을 먹는 게 훨씬 더 낫고 포유동물보다는 곡물을 먹고 살아가는 쪽이 훨씬 더 낫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앞에서..
켄 윌버의 와 혹은 와 을 나란히 놓고 읽어 보라. 같은 저자가 쓴 것이 맞나 의심이 들 것이다. 켄 윌버는 를 쓴 이후 자신의 사고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겪었다. 혁명적으로 도약했다. 는 수없이 쏟아져나오는 영성/명상 관련 책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잘 쓴 책이다. 그러나 기존 책들과 특별히 다를 것은 없다. 우주와 합일하는 궁극의 깨달음을 추구하고 있고,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미 깨달은 존재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깨달음에 도달할 수단 같은 것은 없는 것이며, 다만 우리가 이미 깨달은 상태라는 인식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치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에고는 근원에서 이탈한 일종의 질병으로만 보는 관점이 내재해 있으며, 그렇기에 시비분별과 대립의 세계에서 근원의 세계로, 어머니의 품으로 회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