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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러의 책방
「당신은 최근에 직원을 채용하면서, 왜 다른 사람을 제치고 그 직원을 뽑았는지 이유를 말할 수 있는가? 지난번에 산 잠옷이 왜 마음에 들었는지 알고 있는가?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아는가? 잘 알고 있다고, 너무 자신하지 말라. 사회심리학자들이 지난 50년간 밝혀낸 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은 자신이 왜 그런 식으로 행동했는지, 왜 그런 식으로 판단했는지, 어떤 것을 왜 좋아하고 혹은 싫어하는지에 대해 믿을만한 정보제공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내가 왜 이렇게 했지?"라는 질문에 대해 내 행동을 관찰한 사람보다 더 속 시..
「목적과 행복, 이 두 개념에 대한 결합은 서구인의 사유에 깊숙이 닻을 내리고 있어서, 그들 사유의 오랜 전통이 되었다. 이러한 결합은 그들 사유의 토양과 초석, 그리고 환경을 이루었다. 비로 이러한 결합 위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아리스토렐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I, X)은 이러한 결합을 전제할 필요가 없이 자명한 것으로 놓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려고 하지도 않고 물음을 던지지도 않는다.」* 16/03/18 * 프랑수아 줄리앙. (2014). 장자, 삶의 도를 묻다. (박희영, Trans.). 파주: 한울. 2013/08/07 - 인생은 그냥 있는 그대로 있다2014/09/02 - 동양철학이 철학이냐? 불교가 종교냐?2015/09/07 - 현자는 더는 의미의 문제를 제기하지..
「나는 고정된 목적을 정하지 않는다. 목적은 상황의 전개과정에서 볼 때는 장애물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배치를 적극 활용한다. 혹은 배치가 내게 불리할 경우 우선 나는 불리한 배치를 약화시키는 작업을 한다. 『손자병법』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적이 쉬고서 도착하면 피곤하게 만들어야 한다. 적이 배부른 채 도착하면 배고프게 만들어야 한다. 적이 뭉쳐서 도착하면 흩어지게 만들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 이런 작업을 통해 유리한 조건들이 점차 적에게서 멀어지고 내 쪽으로 기울어지는 흐름으로 적을 끌어들여야 한다. 그 귀결로서 점차적으로 그리고 적이 자각하지도 못한 채 세(勢)가 내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들어오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위대한 전략가는 (계획을) 투영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마주친 상황에..
「식물은 씨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씨는 동시에 식물의 삶 전체의 결과물이다. 식물은 씨를 생산하기 위하여 성장한다. 하지만 삶의 무익함(impuissance)은 씨가 한 개별적 존재자의 시작이자 결과라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출발점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결과물이기에 씨는 다른 것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것이다. 어떠한 개별자의 산물이면서 다른 개별자의 출발점인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은 씨의 단순한 형태가 식물의 성장 과정으로부터 구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씨 안에서 서로 구분되어 있다.」* - 헤겔, 『역사 속의 이성』 "씨는 식물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마지막/목적fin인 것이다."* 15/11/06 * 올리비아 비앙키, & 에두아르 바리보. (2014). 헤겔의 눈물. (..
「중국인들은 실재적인 모든 것을 장치로서 간주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무한한 일련의 가능한 원인들을 찾기 위해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그들은 성향의 불가피한 특성에 민감하기 때문에, 단순히 개연적일 뿐인 목적에 대해서도 사유하지 않는다. 우주 발생론에 관한 목적론적 전제도 이들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그들은 세계의 시초에 대해 이야기하지도, 세계의 결말을 상상해보지도 않는다. 오래전부터 언제나 작동 중인 상호작용만이 존재할 뿐이며, 실재는 이러한 상호작용의 끊임없는 운행일 뿐이다. 그러므로 중국인들은 그리스적 개념에 따라 생성과 감각적인 것에 대립되는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기능할 수 있는 능력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래서 그들은 '실재 속에서 작동 중임을 우리가 어디에서나 확인할 수 있..
「... 지혜의 눈으로 보면, 삶의 의미라는 문제는 그 의미를 잃는다. 또한 현자는 더 이상 진리에도, 그 의미에도,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국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현자라는 것은 더 이상 의미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신비로운 것 혹은 부조리한 것이라는 양자택일은 더 이상 그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양자택일은 그에게 더 이상 사실 혹은 거짓의 양자택일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현자에게 세상과 삶은 자명한 것이다. 현자는 사물은 그러하게 있다고 말하는 것에 만족하는 자이며, 따라서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을 말할 필요가 없는 자이다. 종교가 말하는 것처럼 자발적인 복종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렇게 될 것이다'가 아니며, 철학이 말하는 것처럼 놀..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의 그 어떤 윤리도 피해갈 수 없는 사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수많은 경우에 도덕적으로 의심스럽거나 위태로운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으며, 부정적 부작용의 가능성 또는 개연성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 그리고 어느 선까지, 윤리적으로 선한 목적이 윤리적으로 위태로운 수단과 부작용을 할 수 있는지는 세계의 그 어떤 윤리도 말해줄 수 없습니다.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은 (폭력적) 강제력입니다. 그리고 윤리적으로 볼 때 수단과 목적간의 긴장이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막대한지를 여러분은 아래와 같은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두들 알고 있듯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짐머발트 계열)은 이미 전쟁 중에 하나의 원칙을..
하버드대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허블 이전에 천문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던 할로 섀플리(Harlow Shapley)가 천문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강좌목록에서 알파벳순으로 제일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을('a'stronomy) 그냥 찍은 결과라고 한다.* 요 며칠 읽은 책 **에 의하면, 실험결과 사람들은 오래 분석하고 저울질하여 선택한 물건보다 직감적으로 순식간에 선택한 물건에 차후 후회하는 일도 적고 대체로 더 큰 만족감을 느낀다고 한다. 흔히 우리는 직업선택에 신중하라, 너만의 꿈을 찾아라,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충고를 듣는다. 그에 따라 많은 청년이 내 적성은 무얼까, 왜 난 하고 싶은 것이 없을까, 무얼 해야 하나를 고민하거나 열등감에 빠진다. 그러나 혹 바로 그 '고민'이 그냥 자기 삶을 ..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이성은 물리적으로 부패하는 우주의 맥락에서 복잡성과 새로움에로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하는 반-작인이다. 현실 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목적을 지향하는 이성과 목적인의 관념을 거부한다면, 우주는 기계인 혹은 작용인에 의해서 반복과 쇠퇴만 되풀이할 뿐일 것이다. 이는 우주의 복잡성과 새로움이라는 실재의 한 양상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게 만든다. 우리는 고대와 중세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으로 목적인의 중요성이 현실태의 주된 본성으로 간주되었음을 알고 있다. 화이트헤드가 목적이나 이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그가 고대철학으로 회귀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는 고대철학을 대표하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의 차이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화이트헤드는 모든 현실태가 성취해야 하는 "단..
「사람이 하는 일에 반드시 무슨 '목적'을 찾으려고 하는 것보다 사람을 짜증스럽고 성가시게 하는 일은 없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행위는 전혀 아무런 목적 없이 행해진다. 비록 그러한 행위는 어떤 목적에 기여하긴 하지만, 양자의 입장은 분명히 서로 다르다. 서양인들은 가끔 이 점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도의 내적 원리는 목적이라기보다는 자발성이다. 유태교와 기독교의 하느님과 달리, 도는 사물을 창조하거나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도는 사물들을 '자라나게 하고', '개성을 부여한다'. 노자의 정신에 비추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도는 목적이 없으며 바로 그 이유로 훌륭하게 그 목적을 이룬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참고적으로 말하면, 나는 사람이 목적을 갖는데 반대하는 입장이 아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성경은 우리에게 "너의 주 하나님을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우리는 또한 구원을 찾기 위해 명령을 받기도 한다. 구원을 찾는 것이 우리의 의미이며 우리의 목적은 구원을 받는데 있다. 실제로 신교도의 어떤 교파들은 인간의 목적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원히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도가의 성인이 도 안에서 사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는 '명령을 받아서'도 아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의무'이기 때문도 아니라, 단순히 그렇게 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는 도로부터 어떠한 것도 추구하지 않는다. 즉 도가의 성인은 '영혼을 구원하거나' '어떤 미래의 보상'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도 안에서 사는 것은 어떤 목적이 없다. 도가의 성인은 단순히 거기에 있는 ..
아래 글은 『장자』의 '꽥꽥거린 거위'에 대한 로버트 앨린슨의 해석이다. 「『장자』의 메시지를 따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면서 조용히 있던 거위는 그 메시지를 잘못 이해하였다. 노력하는 바로 그 행위가 잘못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목적없음을 목적으로 삼는 바로 그 시도(조용히 있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식으로)가 잘못인 것이다.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거위는 완고한 신비주의자에 대한 은유이다. 완고한 신비주의자는 모든 말들을 무용하다고 보는 사람이다. 어떤 것도 말해질 수 없고, 따라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신비주의이고, 이것이야말로 정말로 어리석은 거위이다. 정말로 어리석은 거위는 조용히 침묵하는 거위이다. 침묵하는 거위는 거위답지 않다는 바로 그 점에서 어..
이학의 재발견, 좋다. 그러나 우리는 이理(초월, 절대, 신 등등)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거기서 이를 잡든 말든) 일갈한 도올 김용옥에 나는 더 동의한다. 이성은 몸의 느낌을 벗어날 수 없다. 삶의 목적은 순결하고 고상한 이념으로부터가 아니라, 오욕칠정을 가진 몸으로부터 자득(自得)해야 한다. 즉,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근대'는 기학의 축 위에 서 있다. 도저한 근대화가 진척된 지금에도, 그러나 재래의 이학의 관성은 완강하다. 그 기억의 흔적이 기학의 철저화와 전면화로서의 지구촌화나 신자유주의의 이념을 제약하고 있다. 그 갈등은 지금 더욱 첨예해지고 있다. 서구에서는 이미 기학의 사고를 넘어 이학의 재발견이 한창이다. 2003년 하버드에서 열린 다산학 국제학술회의에서 뚜웨..
아래 인용한 켄 윌버의 말들 중 특히 후반부("... 내 인생의 목표는 절망의 뇌출혈 속에 조용히 피흘리며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는 내가 갖고 있던 마음병의 실체를 마치 내 마음을 들여다본 듯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예전 어떤 수행자들은 침묵의 성자 라마나 마하리쉬를 단지 만나뵙는 것만으로도 자기 내면의 고뇌가 불타 사라지곤 했다(로 유명한 서머싯 몸은 마하리쉬를 뵙는 순간 기절했다). 내겐 켄 윌버가 그렇다. 그를 대하고 있노라면, 혜능이 시장바닥에서 금강경의 한 구절을 들었을 때처럼, 마치 번개가 내려치듯이, 정체성의 위기와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마음과 허무가 가라앉는다. 「윌버: ... 이 분기점-5[세계주의]의 자세는 매우 희귀하고 매우 엘리트적이고 매우 어려운 성취입니다. 이러한 세계중..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체철학을 지배하는 세계관의 일반적 정서가 매우 목적론적이라는 데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 인생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도 그는 인생이 그냥 있는 그대로 있다라는 생각을 수용할 수가 없다. 사람이란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다. 이런 단순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없을까? 도가계열의 사상가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이러한 사실이, 서양의 철학자들에게는 단 한순간도 수용된 적이 없다. 그러한 방치는 인간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러한 무의미성이야말로 모든 의미성의 기초가 되어야만 한다.」* - 도올 「'목적'이란 개념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만 떠오르는 것이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목적이 없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 목적 없이 즐겁게 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