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가능성 (8)
모험러의 책방
한 가지 주제를 던지고 모든 이야기를 그 주제를 중심으로 결집시키는 능력, 특급 작가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위쳐를 쓴 안제이 사프콥스키는 물론 그런 특급 작가 중 한 명이다. "가능성의 한계"라는 제목의 중편은, 제목 그대로 자연에 과연 가능성의 한계는 있는가 없는가, 가능성의 한계를 알지 못하는 게 있다면 무엇인가, 가능성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자와 저지하려는 자, 그리고 그 대가는 무엇인가에 관해 기가 막히게 쓰여 있다. 이때 위쳐, 즉 게롤트는 가능성의 한계를 분명하고 명확하게 하려는 자로 등장한다. 위쳐는 항상 '이성적'으로 행동하니까(하지만 그도 이 작품에서 가능성의 한계를 한번 넘어서려 한다. 예니퍼 관련하여. 류트의 현이 끊어지듯 뚝 끊어지고 말지만). 가능성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은..
「그런데 이렇게 생겨난 파생종들이라도 하나의 독립된 정체성을 지닌 개체들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면, 그것도 여전히 하나의 자연종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무엇이 고유한 정체성을 규정하는가이다. 생물학적 의미의 종species 개념은 형태학적, 혹은 생태학적, 유전학적 개념으로도 사용된다. 이런 점에 비추어보면 어떤 일군의 개체들이 고유한 형태학적 특성과 생태적 특성을 공유하고, 유전적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면 하나의 '종'으로 불릴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물리적이고 자연적인 세계와는 다르다고 여겨지는 문화의 세계나 예술의 세계는 파생종이기는 하지만 분명한 하나의 자연종이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문화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함께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 세계다. 우선 우리가 살고..
「피에르 부르디외가 『세계의 비참(La Misère du monde)』의 독자들에게 일깨우는 바, 아주 먼 옛날의 것이긴 하지만 지금도 유효한 히포크라테스 전통에 따르면 진정 효염 있는 치료약은 보이지 않는 질병 ― "환자들이 이에 대해 말하지 않거나 말하는 것을 잊어버린 사실들" ― 을 간파할 때 시작된다. 사회학의 경우 꼭 해야만 하는 일은 "외견상의 징후를 보고 이를 논의하여 결국 그 구조적 원인들을 왜곡하여 드러내는 경우를 밝혀내는 것이다." 우리는 "의심할 바 없이 이 크나큰 불행을(종종 격퇴했다는 주장을 하지만 그 정도로 기여는 못했던) 격퇴시켰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온갖 소소하고 잡다한 불행들이 전례 없이 급증할 조건들을 부여하는 사회적 공간들을 엄청나게 양산한 이 사회 질서에 특징적인 고통..
「그런데 이러한 시인의 소명이 사회학자의 소명과 관련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학자들은 시를 거의 쓰지 않는다(우리 중에는 직업상의 일들로부터 안식년을 내어 글을 쓸 시간을 갖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 해도 우리가 '가짜 시인'처럼 되는 것이 싫거나 '가짜 사회학자'가 되는 게 화가 난다면, 우리 역시 숨어 있는 인간의 가능성들을 발굴하는 진짜 시인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해야만 한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명백하고 자명한 진실들의 벽, 오늘날 지배적인 어떤 이데올로기가 그것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그 지배의 합당함을 입증 받는다면, 바로 그 이데올로기의 벽을 파고들어야 한다. 그러한 벽들을 허무는 것은 시인의 소명일 뿐 아니라 사회학자의 소명이기도 하다. 가능성들 앞에 ..
「조너선 프랜즌(Jonathan Franzen)은 *라는 제목의 글에서 기술 소비주의(techo-consumerism)가 만들어내는 인간관계란 위험을 회피하고자 하는 겁쟁이들이 만들어낸 자기기만적인 가짜 세계라고 비판합니다. 기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기껏해야 안락과 편의일뿐, 우리는 기술이 주는 친절한 반응들과 힘들이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편안함에 서서히 길들여지는 것이죠. 기술은 소비자이자 사용자인 우리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하여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니까요. 우리 모두의 소망이란 결국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일 겁니다. 그리고 기술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그것을 제공해주지요. 프랜즌의 지적은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페이스북의 '좋아요' 버튼을 누르는 행위는 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세계를 맹목적인 암흑의 세계라 단정 지을 때, 그 속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 엘리아스 카네티, 『말의 양심』 중 「작가의 사명」 15/08/06 * 인디고 연구소(InK) 기획. (2014). 희망, 살아 있는 자의 의무: 지그문트 바우만 인터뷰. 서울: 궁리. 에서 재인용. 2015/08/05 - 역사는 사전에 기획될 수 없지만 새로운 싹은 자라고 있다 2015/07/26 - 이론적 희망은 희망일 뿐이지만, 근거 없는 희망을 추구해보고 또 다른 시도를 해봐야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
염구가 말했다. "선생님의 도(道)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힘이 부족합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힘이 부족한 자는 중도에서 포기하는데 지금 너는 스스로 한계를 긋고 있다."(옹야/12) 「즉, 그는 모든 인간의 미흡한 상태를 소여(所與: 주어진 바)가 아니라 하나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모든 인간의 불완전한 상태가 어쩔 수 없는 운명에 의해 주어진 것인가, 스스로에 의한 그때 그때의 선택인가 하는 것은 객관적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현재 상태를 위대한 지향에 의해 조성된 의미망 속에서 재인식할 때 그것이 선택으로 인식된다는 사실이다. 아무런 지향이 없는 자에게 있어서 삶은 지루한 일련의 소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향은 소여를 자기 책임속으로 끌어들이고, 결국..
"여기에 우리는 가능성이 무한한 우주 앞에서 유한한 존재와 육체적 감각을 갖추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우주를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우주의 무한한 가능성은 실재(actuality)입니다."*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 사이의 관계는 바로 내가 말하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은 유한하지만 그런 유한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여러 무한한 가능성에 둘러싸여 있고,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은 그런 무한한 것에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파악하는 데 있습니다. 나는 인간이 직면한 무한한 여러 가능성에 대하여 내가 품고 있는 이런 느낌을 전달할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한한 선택의 다양성, 새롭고도 아직 시도되지 않은 조합의 가능성, 실험에서의 행운의 전기,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 우리가 실험을 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