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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떤 수행자들은 멍청이로 보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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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왜 어떤 영적 수행자들은 어느 면에서는 진전을 이룬 것 같지만 다른 면에서는 여전히 미개한 멍청이로 보이나요?

윌버: (웃음) 의식의 발달 모형을 가지고 내가 하려는 일 중 하나가 두 가지를 개괄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지류와 파동이라고 부를 수 있지요. 지류는 인지적 발달과 정서적 발달, 대인관계의 발달, 영적 발달 등과 같은 서로 다른 발달 계통입니다. 이런 지류들 각각은 그 발달상의 다양한 단계 또는 파동을 거쳐 가지요.

연구 결과가 보여 주는 것은, 첫째 이런 지류들은 아주 독립적으로 발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영적 지류에서는 진전을 이루지만 정서적 또는 대인관계와 같은 다른 지류에서는 '지체될' 수가 있는 것이지요. 둘째, 이런 지류들은 비록 독립적으로 발달하지만 모두가 동일한 발달의 기본 단계 또는 파동을 공유합니다. 가령 모두가 전인습적 형태에서 인습적 형태 그리고 후인습적 형태로 옮겨 가지요.

그래서 서로 다르지만 의식 전개의 동일한 일반적 파동 또는 단계를 가로지르는 수많은 발달 지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 사람들은 한 지류에서는 진전을 이루었지만 다른 지류에서는 '미개한 멍청이'일 수가 있지요(이에 대한 연구가 곧 출간될 『영의 눈: 약간은 미친 세상에 대한 통합적 비전』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점에 대해서라면 맞습니다. 발달은 상당히 고르지 않게 나타날 수가 있지요. 위대한 전승 지혜 대부분이, 상위 또는 후인습적 의식과 인지 그리고 사랑과 연민 같은 상위 또는 후인습적 감정에 이르도록 사람들을 훈련시킵니다. 그러나 특히 인습적 영역에서의 대인관계 발달과 정서적 발달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지요. 많은 수행 진전을 이루었지만 말을 섞어보면 불쾌한 사람들인 명상가들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 분야에서는 서구의 심리 치료가 탁월하지요. 비록 서구의 심리치료가 다른 극단으로 치달아 상위의 자아초월적 파동을 거의 완전히 무시하고 제외하며, 이것이 프로이트와 부처가 만나도록 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13/11/17

* 켄 윌버, <켄 윌버의 일기>에서 인용,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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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s
  • 프로필사진 지성의 전당 2018.07.29 20:54 신고 단언컨대 최고의 상근기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정말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이러한 의제를 놓고, 숙고하고 탐구하는 사람입니다.

    최고의 상근기는 카르마도 아니며, 공덕도 아니며, ‘선택’을 받아서도 아니며, 특정 민족도 아니며, 특정 종교적 신앙심도 아니며, 특정 수행과 고행도 아니며, 특정 지역도 아니며, 특정 문화도 아닙니다.

    대다수의 구도자와 수행자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자기는 태어난 ‘누구와 무엇’으로 여기며, 즉 육체와의 동일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즉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고 여기면서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를 탐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어린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를 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뭐냐 하면, 정말 나는 ‘무엇’일까? 정말 나는 ‘누구’일까? ‘이것이(육체) 정말 나일까?’하고 스스로 자기에 대해서 한 번 더 의심해 보고, 의문을 가져 보는 것입니다.

    자기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거듭날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가 자기를 오해하고 있으며, 그 오해로 인해서 ‘거짓된 자기’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통찰은 ‘자기 불신’을 찾아내는 게 아니라, ‘지금의 자기’를 의심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최고의 상근기는 ‘도가 이렇다, 깨달음이 이렇다, 진리가 이렇다’ 이런 말을 늘어놓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는 ‘나는 무엇이다’에 머물지 말고 “나는 누구인가?”로 넘어오세요.

    이 말이 이해되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나는 누구이다’, ‘나는 무엇이다’에만 자기 ‘스스로’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순수합니까!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

    즉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이 ‘자각’으로 이어지며, ‘자각’함으로 모든 것이 출발하고 ‘시작’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을 안다는 것이고, 자신을 안다는 것은 ‘홀로 독립적이다’라는 이해를 갖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해서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존재’적인 측면에서는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해야만 하며, 설혹 ‘답’을 구했다 할지라도 그 ‘답’의 진위여부는 영원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지금까지의 동일시가 사라지고 나면, ‘나’는 ‘비존재’적인 측면으로서, ‘존재’적인 측면의 ‘주인’임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인’에 대한 자각은 완전한 ‘자유’라 할 수가 있습니다.


    -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합니다. www.uec2018.com
    인문학 도서인데, 한번 검토 부탁드립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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