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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하고 위대한 에고 본문

명문장, 명구절

신성하고 위대한 에고

모험러
에고를 죽이려고 노력했었다니, 아니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미친짓이었던가. 그건 마치 몸을 죽이고도 살아 있기를 바라는 것과 같지 않은가? 에고야 그 동안 정말 미안.

「에고와 영혼, 자아가 모두 동시에 현존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지나칠 정도로 혼동을 일으켜 온 관념인 '무아(無我)'의 진정한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무아는 기능적인 자아가 결여된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그런 상태는 현자가 아닌 정신병자다). 무아는 개인이 더 이상 그런 자아와 배타적으로 동일시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무아'라는 개념에 문제가 있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이 '성인다운'이나 '영적인'이라는 말에 대한 모든 환상을 충족시키기 위해 '에고 없는 현자'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통 현자들이 육신의 욕망이나 욕구 없이 늘 품위 있게 미소 지으며 목 아래로는 죽어 있다는 의미다.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문제를 갖고 있는 것들 모두, 즉 돈이나 음식, 섹스, 관계, 욕구 등을 성인들은 갖고 있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모든 것을 초월'한 '에고 없는 현자들'을 사람들은 원하는 것이다. 말하는 머리를 원하는 것이다. 종교가 모든 저급한 본능, 충동, 관계를 간단히 제거할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는다. 그러므로 어떻게 열정적으로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삶을 회피하고 억압하고 거부하고 도피할 것인가에 대해 종교로부터 조언받기를 기대한다.

다시 말해, 전형적인 개인은 영적 현인이 '개인 이하'이기를, 즉 대개의 인간들을 내모는 모든 지저분하고 원기왕성하고 복잡하고 두근거리며 열망하는 성가신 기운을 어떻게든 가지고 있지 않기를 원한다. 현자들에게는 우리를 내모는 모든 것들이 결여되어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 혼란시키고 고통을 주고 당황하게 하는 모든 것들이 말이다. 우리는 현인들이 그런 것들에 의해 손상되지 않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런 결핍 상태, 비어 있는 상태, 그런 '개인적인 것 이하'가 흔히 '무아'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에고가 없는'이란 말은 '개인적인 것 이하'가 아닌 '개인적인 것 이상'을 의미한다. 개인적인 것에서 무엇을 뺀 것이 아니라 무엇을 더한 것, 즉 보통의 개인적 특성 전부에 어떤 초개인적인 것들을 더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세에서 그리스도, 파드마 삼바바에 이르는 위대한 요가 수행자들과 성인들, 현자들을 생각해 보라. 이들은 나약한 기질의 변변치 못한 남자가 아니라, 작게는 사원에서 가죽채찍을 휘두르는 것부터 크게는 온 나라를 압도하는 것에까지 치열했던 거물이었다. 어떤 그림의 떡 같은 신앙심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말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들 중 여럿이 수천 년이나 지속된 대규모의 사회변혁을 선동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했던 것은 육체적이고 정서적, 심적인 인간성의 차원과 자신의 수레인 자아를 회피했기 때문이 아니다. 세계를 토대까지 뒤흔들 정도로 정력적이고 격렬하게 이것들에 몰입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혼(심층의 심령)과 영(무형의 자아) ― 그들의 권능의 궁극적 원천인 ― 에도 연결되어 있었지만, 그런 권능을 표현하고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바로 그런 권능이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로 전해지는 하위의 차원에 그들이 극적으로 관여했기 때문이다.

이 거물들은 조그만 에고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말 가장 좋은 의미에서 '거대한 에고'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바로 에고(조대 영역의 기능적 수레)가 혼(정묘 영역의 수레) 그리고 참나(시원 영역의 수레)와 나란히 존재할 수 있고 또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위대한 스승들은 한계까지 조대 영역을 움직였는데, 에고가 조대 영역의 기능적 수레이므로 자신의 에고를 통해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에고와 동일시되지는 않았고(그런 사람은 자아도취자다), 찬란한 온우주적 근원에 연결되어 있는 자아를 그저 찾아냈다. 위대한 요가 수행자들, 성인들, 현자들은 엄청난 성취를 이루었다. 바로 겁 많은 소인배 아첨꾼이 아니라 위대하고 거대한 에고였기 때문이다. 온우주 자체의 역동적 기저와 목표에 연결되고 자신의 상위 참나에 연결되어, 브라만과 하나인 순수한 아트만(순수한 나-나)으로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입을 열자 세계는 무릎을 꿇고 벌벌 떨었고 세계의 찬란한 신과 직면하게 되었다.

성 테레사는 위대한 명상가였는가? 그렇다. 그리고 성 테레사는 왕조적 가톨릭 전통 전체(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라)를 개혁시킨 유일한 여성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는 인도를 그 바탕까지 뒤흔들었다. 루미, 플로티누스, 달마, 초걀 보살, 노자, 플라톤, 바알 셈 토브 같은 성현들은 수백 년 때로는 수천 년이나 지속해 온 조대 영역에서 혁명을, 마르크스나 레닌, 로크, 제퍼슨도 당시 감히 주장할 수 없었던 무엇인가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목 아래로는 전부 죽어 있었기에 그렇게 했던 게 아니었다. 아니, 그들은 신에게 직접 연결된 더 심층의 정신에 연결되어 있었던, 기념비적이며 영광스럽고 신성한 거대한 에고였다.

에고를 초월한다는 관념에는 확실히 어떤 진리가 있다. 에고를 파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에고를 뭔가 더 큰 것에 연걸시킨다는 의미다(용수가 말했듯 상대계에서는 참나가 실재다. 그러나 절대계에서는 참나와 무아 어느 쪽도 실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어느 경우에도 무아는 실재에 대한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소아는 증발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 영역에서 활동의 기능적인 중심으로 남는다. 앞에서 말했듯, 그런 에고를 상실한다는 것은 현자가 아니라 정신병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고를 초월하는 것'은 사실, 에고를 더 깊고 상위의 포섭 속에 초월하지만 내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에는 혼 또는 심층의 심령 속에, 그러고는 주시자 또는 근원적 자기와 함께, 그다음에는 각각의 전 단계를 일미의 광채 속에 받아들여 접어 넣고 포함하여. 그리고 이는, 우리가 소아를 '제거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활기차게 소아로 살며, 보다 상위의 진리를 소통하는 데 필요한 수레로 그것을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혼과 영은 신체와 감정 그리고 마음을 포함하지 그것들을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에고는 영에 대한 장애가 아니라 영의 찬란한 현현인 것이다. 에고의 형상을 포함하여 모든 형상은 공(空)과 다르지 않다. 에고를 제거할 필요는 없고, 오히려 단순히 어떤 충만함으로 에고와 더불어 사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동일시가 에고로부터 흘러나와 온우주 전체로 들어갈 때, 에고는 개개의 참나가 실제로는 브라만과 같다는 것을 발견한다. 커다란 자기(the big self)는 실제로 소아가 아니며 그리하여 소아에 갇혀 있는 한, 죽음과 초월이 필요하다. 자기도취자들은 단지 온우주를 포옹할 만큼의 에고를 아직 갖지 못한 것이고, 그래서 대신 스스로가 온우주의 중심이 되고자 애쓰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인들이 대아를 갖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이 어떤 드러난 차원을 조금이라도 보이는 것도 원치 않는다. 언제라도 현인이 돈, 음식, 섹스, 관계에 관한 인간적인 면을 드러내면 우리는 놀라고 또 놀란다. 우리가 삶에서 완전히 도망가려 하고 세속적 삶을 살지 않으려 계획하고 있기 때문에, 세속적 삶을 사는 현인이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밖으로 뛰쳐나가고, 상승하고, 도망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마음껏 즐기면서 삶에 관여하고 삶을 철저히 살아가면서 삶의 모든 파도를 붙잡고 끝까지 파도타기를 하는 현인을 보면, 깊고 철저하게 혼란에 빠지며 놀라는 것이다. 그런 모습의 의미는 우리도 마음껏 즐기며 모든 수준에서 삶에 관여해야 할지 모르고, 빛나는 창공의 구름 속으로 삶에서 그저 도망쳐서는 안 될지 모른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인들이 육체나 에고, 본능적 욕구, 생명의 활기, 섹스, 재물, 관계 또는 (세속적) 삶을 갖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것들은 상습적으로 고통을 주는 것이고 우리가 뛰쳐나가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의 파도를 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파도가 사라지기를 바란다. 허깨비 같은 영성을 원하는 것이다.

통합적 현자, 비이원적 현자는 다른 면을 보여준다. 보통 '탄트라적'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 현자들은 살아가면서 세속적 삶을 초월할 것을 주장한다. 이들은 현실 참여를 통해 해방을 찾아낼 것을, 윤회 가운데에서 열반을 찾아낼 것을, 완전한 세속적 침잠에 의해 총체적 해탈을 찾아낼 것을 주장한다. 그들은 깨어 있는 상태로 아홉 개의 지옥문 속으로 들어간다. 다른 곳 어디에서도 아홉천국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어떤 것도 이질적이지 않다. 일미가 이닌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전체적인 요점은 신체와 그 욕구 속에, 마음과 그 관념 속에, 영혼과 그 빛 속에 완전히 안식하는 것이다. 모두가 똑같이 유일한 일미의 몸짓이므로 완전하게, 동등하게 그리고 동시에 포옹하는 것이다. 욕망을 받아들여 그것이 춤추는 것을 주시하고, 관념속으로 들어가 그 영특함을 따르고, 영에 삼켜져 시간이 이름 붙이는 것을 잊어버린 영광으로 깨어나는 것이다. 완전한 현시의 바탕이 되는 상존하는 각성 속에 신체와 마음 그리고 정신 모두가 똑같이 수용되는 것이다.

밤의 정적 속에 여신이 속삭이고 낮의 광명 속에 사랑하는 신이 포효한다. 생명은 고동치고 마음은 상상하며 감정은 파도치고 상념은 방황한다. 이 모든 것이, 경청하는 모든 이에게 조용히 속삭이며 그 자신의 몸짓으로 영원히 유희하는 일미의 끝없는 움직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닌가? 우르릉 천둥이 칠 때 우리는 참나의 소리를 듣지 않는가? 번개가 내리칠 때 우리는 참나를 보지 않는가? 구름이 하늘을 가로질러 조용히 떠다닐 때 우리를 향해 손을 마주 흔들어 주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무한한 존재가 아닌가?」*

13/11/17

* 켄 윌버, <켄 윌버의 일기>에서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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