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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농사꾼 할머니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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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시인의 연작시 <섬진강>의 작품 배경이 되는 전라북도 임실군 어느 산골 마을, 마을의 한 할머니가 기자 김훈에게 들려준 이야기.

"곡석 기르는 것과 자석 기르는 것이 매한가지여. 오리 새끼 기르는 것과 도야지 새끼 기르는 것도 다 한가지여. 내 속이 폭폭 썩지 않으면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법이여. 내 자석들을 키울 때는 애를 나무 그늘에 재워 놓고 논일을 했었는디, 애가 깨서 울길래 일을 할 수가 없어서 애를 때려 주고 나도 울었어. 그놈들이 자라서 시방 도회지에 나가서 일 다니는디 명절 때는 돌아와. 내가 논에서 일할 때 퍼런 곡석들 틈으로 멀리서 논두렁길을 걸어오는 내 자석들의 모습이 보이면 눈물이 쏟아져서 치맛자락에 코를 팽팽 풀었지.
 
  농사꾼 속 썩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못 견딜 일은 가을에 제값을 못 받는 것이여. 한 번은 강 건너 산에 감을 심었는디, 온 산의 감을 10만 원에 내놓아도 사 가는 사람이 없었어. 곶감을 맨들면 제값을 받을 수 있지만 껍데기 까는 품삯을 댈 수가 없었지. 감이 지천으로 썩어서 떨어지는디, 동네 애들이 텔리비에서 본 야구 흉내를 내느라고 감을 소쿠리에 담아서 물가로 가지고 나와서 몽둥이로 감을 두들겨 깨뜨리며 장난질을 했어. 내가 하도 억장이 무너져서, 이 못된 놈들아, 사람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을 가지고 이게 무슨 벌 받을 짓거리들이냐고 소리 질러서 쫓아 버렸지.
 
  요렇게 소쿠리처럼 산 속에 폭 빠진 마을이지만, 여기서 살아온 이야그 다 하자먼 한도 없고 끝도 없어. 죽은 우리 영감은 임종할 때 자석 새끼들 불러 앉혀 놓고, 너그 엄니 고생 많이 했다. 부디 연탄보일러 놔 드리라고 유언했는디, 여적지 방방이 보일러를 들이지 못했어. 죽은 영감은 살아서 등짐을 너무 많이 져서 어깨부터 썩었겠지만 나는 밭일을 너무 많이 해서 허리부터 썩을 것이구만. 하기사 살은 죽으면 썩어질 것인디, 어디가 먼저 썩은들 그게 무슨 대순가. 나라에 굉(功)이 따로 있간디? 굉이란 게 대체 무엇이여. 우리들처럼 땅 파먹고 제 탯자리 마을 지키면서 애면글면 삭신 부서지게 살다가 죽는 게 바로 굉이여 굉. 바로 고것을 알아야 혀. 내 손이 이렇게 갈퀴처럼 되어 버렸어도 논에서 자라는 퍼런 곡석들을 보면 맘이 좋고 좋고 했어. 오늘 가보면 좋고 내일 가보면 더 좋고 했었어."*
  
12/12/27

* 김훈, "사람의 기쁨과 고난, 그 삶의 무게", <김훈·박래부의 문학기행 둘>에서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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