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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에 대하여 본문

명문장, 명구절

개소리에 대하여

모험러

해리 프랭크퍼트, ′개소리에 대하여′, 이윤 옮김. 필로소픽 출판사. 에서 모두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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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에 대한 관심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 즉 사태의 진상이 실제로 어떠한지에 대한 무관심. 이것이 바로 내가 개소리의 본질이라고 보는 것이다.


개소리는 진리에 대한 관심 없이 만들어지지만, 그것이 꼭 거짓일 필요는 없다. 개소리를 하는 사람은 진상을 꾸며낸다. 하지만 이것은 그가 반드시 그것들을 왜곡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개소리쟁이는 거짓말쟁이와는 달리 진리의 권위를 부정하지도, 그것에 맞서지도 않는다. 개소리쟁이는 진리의 권위에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다. 이 점 때문에,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훨씬 더 큰 진리의 적이다.


오늘날 개소리의 확산은 또한 다양한 형태의 회의주의 속에 보다 깊은 원천을 두고 있다. 회의주의는 우리가 객관적 실재에 접근할 수 있는 어떤 신뢰할 만한 방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따라서 그것은 사태의 진상이 어떠한 지를 인식할 가능성을 부인한다. 이러한 ′반실재론적′ 신조는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사심없이 노력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확신을 무너뜨리고, 심지어 객관적 탐구라는 개념이 이해 가능한 개념이라는 믿음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믿음의 상실에 대한 하나의 반응은 정확성(correctness)이라는 이념에 대한 헌신이 요구하는 규율에서 전혀 다른 규율로 후퇴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진정성(sincerity)이라는 대안적 이념을 추구할 때 요구되는 규율이다. 개인들은 주로 공동 세계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 성공하기를 추구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전달해보겠다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실재에는 사물에 대한 진리로 간주할 만한 본래적 속성이 없다는 확신 속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본성에 충실하려는 데 전념했다. 이것은 마치 사실에 충실하려는 것이 무의미하므로, 그 대신 개인들은 자신에 대해 충실하려 노력해야 한다고 결심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본성은 사실 붙잡기 어려울 정도로 실체가 없다. 다른 사물들에 비해 악명 높을 정도로 덜 안정적이고 덜 본래적이다. 그리고 사실이 이런 한, 진정성 그 자체가 개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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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글



거짓말은 거짓임이 들통나면 커다란 비난이 쏟아지지만, 개소리에 대해서는 그저 어깨만 으쓱하고 지나칠 뿐이다. 거짓말이 실패하면 수치스럽지만, 개소리는 실패하더라도 관용된다. 개소리에 대해서 정색하고 달려들면 웃자고 하는 소리에 죽자고 달려든다고 역공을 받는다. 사람들은 개소리가 실패의 책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점을 깨닫고는 개소리의 무책임을 누리기 위해 말에서 진리치를 희석한다. 개소리로 돌파할 수 있는 곳에서는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


결정적으로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강력하다. 예를 들어 미국의 보수정치가 트럼프는 진리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때문에 그처럼 강력하고 효과적일 수 있었다. 트럼프의 말이 사실인가? 그러면 좋다. 트럼프의 말이 거짓인가? 그래도 좋다. 어차피 개소리쟁이와 그 지지자들은 참과 거짓이라는 진릿값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논리적 공간에서 언어게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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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훈,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의 해제


진리 존중에 수반하는 규율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사심 없이 노력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확신′에 기초하며 ′정확성이라는 이념에 대한 헌신′이 요구하는 규율이다. 이러한 규율의 구체적 내용은, 주어진 증거들을 세심하게 살피는 일, 자신의 주장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부터 인정하는 일,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에 반하는 증거들을 오히려 더 열심히 찾아 나서는 일 등을 포함할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주장이 참이라는 데 대해서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이는 사람은 오히려 진리의 권위를 승인하는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있으며, 그런 사람은 상황에 따라서 개소리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진리에 대한 굳은 신념이 개소리하기를 피할 수 있는 충분조건이 되지 못하듯이, 진정성이 있다는 것 역시 개소리하기로부터 우리를 지켜주기에 충분한 보호막이 되지 못한다. 


프랭크퍼트는 진정성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통해서 넓은 의미의 ′반실재론′ 일반을 비판한다. 그가 타깃으로 삼는 것은, ′진리′를 시대착오적인 낡은 개념으로 생각하는 태도이다. 프랭크퍼트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침묵하거나 아니면 계속해서 개소리만을 지껄일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반실재론자′가 프랭크퍼트의 이러한 비판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그의 개소리 분석을 거부하거나 어떤 상황에서는 개소리를 해도 괜찮다는 것을 승인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18/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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