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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하는 일은 생명력과 에너지를 소모한다

모험러

「뱃사공은 배를 다루고 조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배를 흘러가게만 하면 된다. 내가 대상의 운행 방식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이러한 궁극의 단계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에 대해 나는 전혀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된다. 즉, 그것은 “자연스럽게” 될 뿐만 아니라, “명”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물 안에 있는 이 헤엄치는 자를 따라가듯이, 우리는 땅 위에 있는 무용수를 따라가 볼 수 있다. 무용수는 완벽하게 춤을 추는데, 그 이유는 그의 모든 동작들이 마치 “명”에 따라 행해지듯 ― 장자에서 매우 적절하게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무용수는 그를 이끄는 이러한 춤의 운행성에 내재해 있는 순수 논리가 자신의 온몸을 관통해 스며들어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래서 그는 몸과 정신 사이에서 어떠한 분리나 분열도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된다. 


오직 이러한 점진적 귀납을 통해, 즉 행위가 더 이상 의도적으로 행해지지 않고 과정 자체가 망각될 정도로 기술과의 동화가 이루어짐을 통해 완전성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은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는 길이다. 


“도공 공수가 [도면을 그리며] 줄을 그으면 그림쇠나 곱자보다도 뛰어났다. [그의] 손이 그림쇠와 곱자와 함께 변화하므로(움직이므로) 마음에 생각 따위가 깃들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은 하나가 되어 막히지 않는다”(19장, 곽경번 판, p.662).


여기에서 물질적인 것을 초월해 얻고자 하는 결과를 자연스럽게(완벽하게) 실현시키는 이 정신세계의 경지가 “마음-정신”을 온통 쏟아붓는 행위로부터 구별되고, 더 나아가 대립된다는 사실의 증거가 다시금 주어진다.


“발을 잊는 것은 신이 꼭 맞기 때문이고, 허리를 잊는 것은 띠가 꼭 맞기 때문이다. 시비를 잊는 것은 마음이 [자연스러움에] 알맞기 때문이다. 마음이 변동하지 않고 외물을 따르지 않는 것은 스스로의 처지에 편히 있으며, 거기에 알맞기 때문이다”(19장, 곽경번 판, p.662).


알맞음이 과정 그 자체로부터 나오고 의도된 것이 아니듯이, 이러한 알맞음은 완벽하게 되어, 그 알맞음 자체도 잊은 참된 자적의 경지에 이르고 그 결과 아무런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게 된다. 반면에 이런 알맞음이 외적인 것에 의해 강요될 때 ― 이 “외적인 것”이 다른 사람의 명령이든지 자기 스스로가 정한 명령이든지 간에 ― 그리고 이것을 닮아야 할 모델로 설정하거나 실천의 목표로 놓았을 때, 이러한 알맞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같은 장(여러 갈래로 나뉘고 서로 연결 또는 대조되는 이야기들의 조합을 통해 구성된)의 앞선 일화 속에서, 장공은 “나아가고 물러감이 먹줄을 친 듯이 곧고, 좌우로 돌면 그림쇠로 그린 듯이 둥글게 말과 마차를 모는” 동야직의 신기를 목도하게 된다(19장, 곽경번 판, p.660). 그러나 말을 천의 무늬만큼이나 반듯하게 논두렁길로 선회시키는 것을 보고, [장공의 신하인] 안합은 말이 곧 쓰러지리라는 사실을 쉽게 예견한다. 


결국 문제(유일한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생명력의 보존이다. 그런데 일정한 목표의 추구와 궁극적 목적 ― 그것이 행복일지라도 ― 에 대한 탐구, 이 모든 것들은 생명력을 소진시키게 된다.」*


16/03/14


* 프랑수아 줄리앙. (2014). 장자, 삶의 도를 묻다. (박희영, Trans.). 파주: 한울. 에서 발췌, 문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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