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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작 비화 본문

명문장, 명구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작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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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증>이란 책을 보면 할리우드 영화 산업의 개척자들은 다들  제정신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미쳤다. 그들의 광적인 열정은 산업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키는 점화제가 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태우는 불길이 된다. 

「시간 손실분을 메우기 위해 데이비드('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제작자)는 배우와 스태프를 섭씨 50도에 육박하는 땡볕 아래로 내몰았다. 그렇게 주6일, 하루 12시간씩 촬영 강행군을 했다. 하워드에 따르면 신경쇠약 일보 직전까지 간 스태프들이 절반이나 됐다고 한다. 그리고 감독이었던 플레밍은 아예 그 선을 넘어버렸다. 하루는 밤에 차를 몰고 집에 가는 길이었는데 차가 낭떠러지로 향하는데도 그냥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신경쇠약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세 번째 감독은 샘 우드였다. 플레밍이 퇴원하자 데이비드는 2교대 작업을 하기 위해 두 사람을 모두 고용했다. 그리고 플레밍은 주간에, 우드는 야간에 작업을 했다.

너무 완벽함을 추구한 나머지 데이비드는 때로 비합리적인 요구를 하기도 했다. 한 예로, 관객들이 눈여겨보지도 않는 전통 수공예 레이스 속옷을 수만 달러나 주고 구입한 것이다. 여배우들이 연기에 몰입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어떤 측면에서 본다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세기의 고전으로 만든 것은 그런 완벽함에 대한 집착이었을지도 모른다. 후송을 기다리며 역 앞에 널브러져 있는 수천 명의 남부군 부상병들을 화면에 담기 위해 카메라를 위로 돌리며 촬영한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압권이었다. 흔히 '수천 명의 출연진'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실제로 할리우드에서 그렇게 많은 출연자들을 사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역사적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진짜로 수천 명의 엑스트라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속해서 밀려드는 부상병들의 모습을 묵음으로 조용히 카메라에 담음으로써 남북전쟁의 참상을 좀 더 사실적으로 전달하려 했던 것이다. 데이비드는 점점 미쳐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광적인 천재였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역사상 최고의 영화"라는 극찬을 받았다. 또 단일 영화로는 최다 수상 기록을 세우며 1930년도 아카데미 시상식을 쉽쓸었다. SIP만큼 화려하게 출발한 영화사도 없었다. 그리고 SIP가 이 한 편의 히트작으로 끝났다 하더라도 그리 놀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두 번째 영화를 위해 데이비드는 유럽 여행 중에 발견한 두 명의 인재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바로 알프레드 히치콕과 잉그리드 버그만이었다.

그런 다음 그는 그 모든 것을 파괴했다.」*

14/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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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리뷰, 책 발췌, 낭독, 잡문 등을 남기는 온라인 책방. 유튜브 채널 '모험러의 책방'과 ′모험러의 어드벤처′(게임) 운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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