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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은 수단을 어디까지 정당화하는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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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은 수단을 어디까지 정당화하는가?

모험러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의 그 어떤 윤리도 피해갈 수 없는 사실은,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수많은 경우에 도덕적으로 의심스럽거나 위태로운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으며, 부정적 부작용의 가능성 또는 개연성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 그리고 어느 선까지, 윤리적으로 선한 목적이 윤리적으로 위태로운 수단과 부작용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는 세계의 그 어떤 윤리도 말해줄 수 없습니다.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은 (폭력적) 강제력입니다. 그리고 윤리적으로 볼 때 수단과 목적간의 긴장이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막대한지를 여러분은 아래와 같은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두들 알고 있듯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짐머발트 계열)은 이미 전쟁 중에 하나의 원칙을 천명했는데 이 원칙을 요점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만약, 앞으로 몇 년 동안 전쟁을 더 계속하면 혁명이 일어날 것이고, 지금 강화를 맺으면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두 가지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몇 년 동안 더 전쟁하기>를 선택할 것이다!" 이에 연이어 "그럼 이 혁명은 무엇을 가져다줄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과학적 훈련을 받은 사회주의자라면 누구나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에서 사회주의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경제체제로의 이행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단지 봉건적 요소와 왕조적 잔재들을 털어버렸을 뿐인 부르주아 경제체제가 다시 성립할 것이다." 이런 하찮은 결과를 위해서 <아직도 몇 년간 더 전쟁을> 하자는 것입니다! 감히 말하건대, 이 경우에는 매우 확고한 사회주의적 신념을 가진 사람도 그런 <수단>을 요구하는 혁명이라는 이름의 <목적>을 거부할 것입니다. 그러나 볼세비즘과 스파르타쿠스주의, 아니 모든 종류의 혁명적 사회주의에서는 상황이 바로 그러합니다. 그래서 이 진영이 구 체제의 <폭력정치>를, 그 수단의 폭력성을 이유로 해서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지극히 가소로운 일입니다. 비록 구체제 폭력정치의 목적들을 거부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바로 이 문제, 즉 목적에 의한 수단의 정당화라는 이 문제에서 모든 신념윤리는 좌절할 수밖에 없는 듯이 보입니다. 논리적으로만 보면 실제로 신념윤리는 도덕적으로 위태로운 수단을 사용하는 모든 행동을 배척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논리적으로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세계에서는 신념윤리가가 갑자기 종말론적 예언자로 변신하는 것을 흔히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방금 <폭력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설교하던 자들이 그 다음 순간 폭력행사를 호소합니다. 물론 이들은 이것이 마지막 폭력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폭력성이 제거된 상태를 가져다줄 마지막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장교들이 병사들에게 공격작전 때마다, 이 공격이 마지막이고 이것이 승리와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신념윤리가는 세계의 비합리성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는 우주적·윤리적 <합리주의자>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도스토예프스키를 아는 사람들은 대심문관이 나오는 장면을 기억할 것입니다만, 거기에 바로 이 문제가 탁월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조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며, 설사 우리가 목적에 의한 수단의 정당화라는 원칙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목적이 어떤 수단을 정당화하는지를 윤리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의 신념이 가진 참다운 순수성 때문에 내가 개인적으로는 매우 높이 평가하지만, 정치가로서는 절대로 거부하는 동료 교수 푀스터는 그의 저서에서 이 어려움을 다음과 같은 단순한 명제를 통해 피해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선한 것에서는 오로지 선한 것만 나올 수 있고 악한 것에서는 단지 악한 것만 나올 수 있다는 명제가 그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물론 지금까지 논의한 모든 문제는 전혀 존재하지도 않겠지요. 그러나 정말 놀라운 것은, 우파니샤드가 씌어진 지 2,500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그런 명제가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세계역사의 전 과정뿐 아니라 일상적 경험만 냉철히 분석해 보아도 오히려 그 정반대가 사실임을 알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위의 푀스터 교수 명제가 정반대가 사실이라는 점 때문에 지구상의 모든 종교가 발생했는데도 말입니다. 신정론이 안고 있었던 가장 오래된 문제는 다름 아닌 다음과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어떻게 전지전능하면서 동시에 자비롭다고 믿어지는 신의 힘이 그렇게도 비합리적 세계, 다시 말하여 부당한 고통, 처벌받지 않는 불의, 그리고 개선의 여지가 없는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비합리적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는가? 따라서 이 신적 힘은 전지전능하지 않거나 아니면 자비롭지 않은 힘일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보상과 보복의 원칙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 원칙들은 형이상학적으로 해석이 가능한 것들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에게는 영원히 해석 불가능한 것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 문제, 즉 세계의 비합리성의 경험이라는 문제가 모든 종교발전의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인도의 업보이론, 그리고 페르시아의 이원론, 원죄설, 예정조화설 그리고 <숨어 계신 신> 등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세계의 비합리성에 대한 경험에서 발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들도, 세상은 악령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권력과 폭력적 강제력을 수단으로 하는 정치에 뛰어드는 자는 악마적 세력과 계약을 맺는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으며, 또한 정치가의 행위에서는, 선한 것에서는 선한 것만이, 악한 것에서는 악한 것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정반대일 경우가 흔하다는 사실도 매우 잘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자는, 정치적으로는 정말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15/09/03


* 막스 베버. (2007). 직업으로서의 정치. (전성우, Trans.). 나남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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