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러의 책방
정치는 폭력과 손을 잡는 것이며, 내적인 힘이 약한자는 그 힘에 짓눌려 변질된다 본문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 특히 정치를 직업으로 삼겠다는 사람이면 누구나 상기한 윤리적 역설들을 자각하고 있어야 하고, 또한 이 역설들의 중압에 눌려서 그 자신이 변질된다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는 모든 폭력성에 잠복해 있는 악마적 힘들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범우주적 인간사랑과 자비의 위대한 대가들 ― 이들이 나사렛에서 왔든, 아시시에서 왔든 또는 인도의 왕궁에서 왔든 상관없이 ― 은 폭력이라는 정치적 수단을 가지고 있한 적은 없습니다. 그들의 왕국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습니다만, 그러나 그들은 이 세상에 영향을 끼쳤고 또 아직도 끼치고 있습니다. 플라톤 카라타예브 같은 인물, 도스토예프스키의 성자들과 같은 인물이 아직까지도 이런 대가들의 가장 적절한 형상화입니다. 자신의 영혼의 구원 또는 타인의 영혼의 구제를 원하는 자는, 이것을 정치라는 방법으로 달성하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정치는 젼혀 다른 과업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 과업들은 폭력의 수단을 통해서만 완수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사랑의 신, 또한 교회를 통해 구현된 기독교의 신은 정치를 수호하는 신이나 데몬과는 내적 긴장관계에 있으며, 이 긴장관계는 해소될 수 없는 갈등으로 언제든 표출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지배 시대의 사람들도 알고 있었던 사실입니다. 예컨대 성무 금지령이 되풀이해 피렌체 시에 부과되었는데, 이 금지령은 그 당시 사람들과 그들의 영혼구원을 위해서는 칸트적 윤리적 판단의 (피히테의 말을 빌리면) <냉정한 동의>보다는 훤씬 더 큰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렌체 시민들은 교회국가에 저항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염두해 두고 마키아벨리는 ―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 그가 쓴 피렌체 역사의 한 아름다운 구절에서 그의 주인공 중 하나의 입을 빌려, 고향 도시의 위대함이 자신의 영혼의 구원보다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시민들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고향 도시 또는 <조국>이라는 말의 자리에 ― 조국이라는 것이 오늘날에는 모두가 공유하는 가치는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만 ― <사회주의의 미래> 또는 <국제적 평화의 미래>라는 말을 집어넣는다면, 여러분은 위에서 논의한 문제의 현대판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회주의의 미래라든가 국제적 평화라든가 이런 모든 것을 정치적 행위를 통해서 추구하는데, 정치적 행위는 폭력적 수단을 가지고 그리고 책임 윤리하에서 수행되는 것이며 따라서 위의 목적들의 추구는 <영혼의 구원>을 위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런 목적들을 종교적 신앙투쟁에서와 같은 순수한 신념윤리를 가지고 추구한다면, 이것은 이 목적들에 손상을 입힐 뿐 아니라 또한 이 고귀한 목적들을 수세대 동안 불신의 대상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신념윤리적 행위자에게는 결과들에 대한 책임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신념윤리를 따를 경우 행위자는 모든 정치적 행위에 개입되어 있는 상기한 악마적 힘들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이 힘들은 무자비하며, 만약 그가 그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이 힘들이 비단 그의 관련 행위뿐 아니라 그의 내면 전체에 대해 초래하는 결과에 그는 무력하게 내맡겨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악마, 그는 늙었다. 너희들도 나이를 먹어봐야 그를 이해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이 뜻하는 바는 햇수, 즉 연령이 아닙니다. 나도 토론에서 출생 증명서의 날짜로 나를 압도하려는 자는 한 번도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 사람은 20살이고 나는 50살이 넘었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내가, 그런 젊음 자체가 하나의 업적이며 나는 이 업적에 대한 존경심에서 어쩔 줄 모른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다시 말하여, 나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현실에 대한 훈련되고 가차없는 시각과, 이 현실을 견디어 내고 이것을 내적으로 감당해 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정치는 확실히 머리로 하는 것입니다만, 머리로만 하는 것을 결코 아닙니다. 이 점에서 신념윤리가로 행동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책임윤리가로서 행동하는 것이 옳은지 여부, 그리고 언제는 신념윤리가로, 또 언제는 책임윤리가로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지시할 수 없습니다. 다만 다음과 같은 점은 지적할 수 있습니다. <비창조적> 흥분의 시대인 오늘날 ― 여러분들은 비창조적이지 않다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아무튼 흥분이 항상 진정한 열정인 것은 아닙니다 ― 갑자기 곳곳에서 신념윤리가들이 아래와 같은 구호를 외치며 다수 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어리석고 비열하지 내가 그런 것이 아니다.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있으며,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있으며 나는 이들의 어리석음과 비열함을 뿌리뽑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 말하는 자들에게 나는 우선 그들의 신념윤리를 뒷받침하고 있는 내적인 힘이 어느 정도인지 묻습니다. 내가 받은 인상은, 이들 열 명 중 아홉은 스스로 주장하는 것을 진정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낭만적 감흥에 도취하고 있을 뿐인 허풍선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는 인간적으로 나의 관심을 끌지 않으며 또 나를 추호도 감동시키지 않습니다. 그에 반해 한 성숙한 인간이 ― 나이가 많고 적고는 상관없습니다 ―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진정으로 그리고 온 마음으로 느끼며 책임윤리적으로 행동하다가 어떤 한 지점에 와서, "이것이 나의 신념이오. 나는 이 신념과 달리는 행동할 수는 없소"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비할 바 없이 감동적인 것입니다. 이런 것이 인간적으로 순수한 것이며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중 내적으로 죽어 있지 않는 자라면 누구나 언젠가는 이런 상황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는 서로 절대적 대립관계가 아니라 보완관계에 있으며 이 두 윤리가 함께 비로소 참다운 인간,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질 수 있는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것입니다.」*
15/09/04
* 막스 베버. (2007). 직업으로서의 정치. (전성우, Trans.). 나남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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