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러의 책방
역사는 사전에 기획될 수 없지만 새로운 싹은 자라고 있다 본문
「음,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수백 년이나 된 떡갈나무들도 모두 하나의 작은 도토리에서 시작되었죠. 이는 통계들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여론 조사를 해보면 우리는 대부분 다수의 힘에 이끌리지요. 물론 각각의 의견이 다를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다수 의견을 배후로 갖는 생각들로부터 자신의 입장을 이끌어냅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다수는 결국 또 소수에서 시작된 것들이죠.
그래서 어떤 변화의 주체나 기관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 미리 예측해보자면, 어떤 식으로든 파편적으로 분산되어 있으면서도 자연발생적으로 집합체를 이루는 ‘정서의 공동체’라는 형태를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때때로 하나의 중심을 갖는 힘으로 결집되기도 하고, 스스로 제도화를 거쳐 기관을 탄생시키기도 하며, 때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도 남기지 않고 서서히 사라져버리기도 하는 형태 말이지요. 감히 예건하건데, 저는 이러한 주체의 탄생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아마 브라질 어딘가에서, 혹은 한국의 작은 마을 어딘가에서 새로운 힘이 생겨나고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리고 이 힘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해줄지도 모를 일이지요.
하지만 이것이 실제로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저도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좋은 사회에 대한 제한된 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완벽한 사회의 모델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있었고, 어떤 식으로 작동해야 하는지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곤 했었죠. 그런데 제게 주어진 소명의 마지막에 다다른 지금, 저는 좋은 사회란 ‘지금 이 사회가 결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즉 자기 비판적이면서도, 잘못된 것을 개선하고, 나아가 변화를 원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입니다. 그것이 좋은 사회 혹은 공동선이 실현된 사회―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에 대해 제가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단 하나의 정의입니다. 나머지 것들은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하는가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결국 완벽히 예측 가능한 미래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미래는 여기 제 앞에 있는 여러분들, 또는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 의해 생산되는 것입니다. 다만 이 맥락에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최근에 사망한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이 행했던 작업들입니다. 그는 정치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거의 모든 정치적 집단에 몸담았었고, 사유를 통해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기술을 실천하는 데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죠. 실천과 관련해서는 그를 따라올 자가 없지요. 하벨은 정치범 수용소에 수년간 갇혀 있었고, 또 이후에는 대통령궁에서 수년을 보냈습니다. 양쪽 극단에서 정치를 경험한 셈이죠. 그리고 죽기 얼마 전, 하벨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만약 당신이 미래에 영향을 미치고 싶다면, 국민이 어떤 노래를 부르고 싶어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 말은 어떤 면에서 낙관적인 언명입니다. 노래를 배우기만하면 미래를 통제할 방법을 알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는 그 뒤에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문제는 다음 해에 국민이 어떤 노래를 부르고 싶어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실제로 일어나기도 전에 역사를 기획할 수 있다는 예언과 환상을 경계하라는 조언이지요.」*
15/08/05
* 인디고 연구소(InK) 기획. (2014). 희망, 살아 있는 자의 의무: 지그문트 바우만 인터뷰. 서울: 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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