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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러의 책방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Cornelius Castoriadis)의 『서양의 파산(Le délabrement de l'Occident)』을 인용해보자. 자율적인 사회, 진정 민주주의 사회는 미리 주어진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는 사회이며, 그리하여 새로운 제반 의미를 창조하도록 해방하는 사회이다. 그러한 사회에서 모든 개인은 자신들의 삶을 위해서 그들이 하고자 하는(그리고 할 능력이 되는) 창조를 자유롭게 한다. 사회는 일단 '확실시되는' 의미란 없다는 것, 그 사회가 혼란을 바탕으로 살고 있다는 것, 사회 그 자체도 하나의 형식이지만 최종 고착되는 일이 없는 그러한 형식을 추구하는 일종의 혼란임을 스스로 알게 될 때 진정 자율적 사회가 된다. 확실히 보장되는 의미들 ― 절대적 진실, 미리 지정된 행동..
「무거운 근대에서 가벼운 근대로, 고체 근대에서 액체 혹은 유동화된 근대로 가는 길은 노동운동의 역사가 아로새겨진 골조를 구성하고 있다. 그 길은 또한 먼 길을 돌아, 역사의 악평이 자자한 소용돌이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지구상의 '선진화된'('근대화'라는 의미에서) 지역 전반에서 노동운동이 쇠퇴해버린 끔찍한 난국을 ― 이를 야기한 것이 대중매체의 무력화의 여파이든 광고업주들의 음모이든 소비자 사회의 유인력 때문이든 혹은 볼거리 여흥 위주의 사회가 주의를 산만하게 한 것이든 간에 ― 그저 대중적 분위기가 변한 것으로 설명해 버리고 마는 것은 합리적이지도 그다지 설득력이 있지도 않다. 엄청난 실책을 놓고 이를 '노동 정치가들'의 양면성 때문이라고 탓해보았자 소용없다. 삶의 맥락과 사람들이 살아온..
「전례 없는 정도로 오늘날의 정치는 자본이 움직이는 속도와 지역 실권자들의 '(속도를) 늦추는 능력' 간의 전투 같은 것이 되고 있는데, 여기서 승산이 없는 싸움을 하는 것처럼 느끼는 쪽은 지역 기구들이다. 유권자들의 안녕에 헌신하는 정부라면, 자본이 자국으로 들어오게 하고, 일단 들어오면 관광객처럼 하루하루 숙박료를 내며 호텔방에 머무는 게 아니라 하늘을 찌르는 빌딩 사무실을 세워달라고 감언이설을 할 도리밖에 없다. (자유무역 시대의 흔한 정치용어를 빌리자면)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위한 더 나은 환경을 만드는 것', 이는 곧 정치게임을 '자유로운 기업'의 규칙에 알맞게 바꾼다는 것으로, 이를 통해서만 자본 유치를 이룰 수 있고 이루려고 시도해볼 수 있다. 즉, 규제완화, '기업 활동 규제' 법률과 조항..
「물론 이런 상황이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노동인생이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것은 태곳적부터 그랬다고. 그러나 오늘날의 불확실성은 경악을 금치 못할 만큼 새로운 유형이다. 우리의 생계와 장래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지도 모를 이 두려운 재앙은 쫓아버릴 수도 없는, 논쟁하고 합의하고 강제하여 얻은 조치들을 통해 단결하여 파국의 정도를 완화시킬 수도 없는 종류의 것이다. 가장 끔찍한 재앙이 제멋대로 강타하면서, 기괴한 논리로 혹은 도무지 논리랄 것도 없이 희생양을 골라 변덕스럽게 주먹을 여기저기 휘두르기에, 누가 끝장날지 누가 살아남을지 예상할 도리가 없다. 오늘날의 불확실성은 강력한 개인화의 힘이 되고 있다. 통합하기보단 분리하며, 다음날 눈을 떠보면 어떤 식으로 분리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낡은 지역적/공동체적 유대를 허물고, 습관적 방식과 관습적 법칙에 전쟁을 선포하고, 과거와 매개하는 모든 힘들을 갈아서 분쇄해버리는 일, 이 모들 일의 전반적 결과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혼미한 망상이었다. '견고한 것들을 녹이는 것'은 강철 기둥을 세우기 위해 철을 녹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녹아서 이제 액체가 된 현실들은 새로운 수로를 따라 새로운 주형틀에 담겨 어떤 형태를 갖출 태세가 된 것처럼 보였다. 과거에 그 현실들이 스스로 형성해놓았던 강바닥을 흘러갔더라면 결코 얻지 못했을 형태 말이다. 아무리 야심만만한 목표라고 하더라도, 생각하고 발견하고 발명하며 계획하고 행동하는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지는 못할 것처럼 보였다. 행복한 사회,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사회가 바로 다음 모퉁이까지 와 있다고 할..
「그러나 만일 자기 확신 ― '현재를 단단히 부여잡고 있다'는 확신감 ― 이 진보에 대한 믿음이 자리할 유일한 기초라면, 우리 시대에 믿음이 불안정해지고 취약해진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왜 그리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먼저, '세상을 앞으로 가게끔 하는' 힘이 뚜렷하게 부족하다는 것이다. 액체 근대를 맞이한 우리 시대의 가장 통렬하면서도 해답이 요원한 질문은 (세상을 더 나은, 더 행복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이다. ... 기 드보르를 인용하자면, "통제센터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제 유명한 지도자나 분명한 이데올로기가 그 중심을 점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두번째로, 실천주체가 ― 어떤 실천주체이든지 간에 ― ..
「요컨대 결국 '액체' 근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세 가지 조건 속에 내던져진다는 뜻입니다. 첫째, 우리는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 예측하려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결코 측정되지 않는 지속적인 위험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삶에는 늘 감당하기 힘든 변수들이 있기 마련이지요. 셋째, 신뢰의 위기 속에서도 과감히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믿을 만한 일들이 미래에는 비난받거나 배제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비단 일의 영역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곳에 적용되는 진실이기도 하지요. 이제 우리는 개인의 어깨에 지워진 책임의 무게를 넘어, 자기 결단과 해방의 자유, 거대한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공동의 노력을 향한 책임의 '통각'을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