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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이 순응의 이면이듯이 퇴행은 책임의 이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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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이 순응의 이면이듯이 퇴행은 책임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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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Cornelius Castoriadis)의 『서양의 파산(Le délabrement de l'Occident)』을 인용해보자.


자율적인 사회, 진정 민주주의 사회는 미리 주어진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는 사회이며, 그리하여 새로운 제반 의미를 창조하도록 해방하는 사회이다. 그러한 사회에서 모든 개인은 자신들의 삶을 위해서 그들이 하고자 하는(그리고 할 능력이 되는) 창조를 자유롭게 한다.


사회는 일단 '확실시되는' 의미란 없다는 것, 그 사회가 혼란을 바탕으로 살고 있다는 것, 사회 그 자체도 하나의 형식이지만 최종 고착되는 일이 없는 그러한 형식을 추구하는 일종의 혼란임을 스스로 알게 될 때 진정 자율적 사회가 된다. 확실히 보장되는 의미들 ― 절대적 진실, 미리 지정된 행동 규범, 더 이상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는 옳고 그름에 대해 미리 나누어진 경계선들, 성공적 행동임을 보장하는 제반규칙들 ― 이 없다는 것은 진정 자율적 사회와 진정 자유로운 개인이 있기 위해 동시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조건이다. 자율적 사회와 그 구성원의 자유는 서로서로를 조건 짓는다. 민주주의와 개인성이 이루어낸 어떤 안전도 인간 조건의 만성화된 우발성과 불확실성과의 싸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인간 조건을 인식하고 결과를 정면으로 대하는 데 달려 일는 것이다.


고체 근대의 후원 아래 태어나고 발전한 정통 사회학이 인간의 복종과 순응의 조건들에 온 신경을 썼다면, 액체 근대에 걸맞은 사회학이 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자율성과 자유의 촉진이다. 그러한 사회학은 따라서 개인의 자각과 이해, 그리고 책임을 반드시 그 초점으로 삼아야 한다. 고체화되고 관리 감독되는 근대 사회의 주민들에게 주어진 대립 지점은 순응인가 이탈인가였다. 오늘날의 액화되고 중심을 해체당한 단계의 사회에 주어진 대립 지점은, 진정 자율적 사회로 가는 길을 마련하기 위해 꼭 직면해야 할 대립 지점은 책임을 떠맡을 것인가 아니면 개인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굳이 그 행위자가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어떤 피난처를 찾을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


올바르게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어떤 확고하고도 신뢰할만한 보장이 없이, 우리가 대단히 많은 서로 다투는 가치관들, 규범들, 삶의 방식들 한가운데 처해 있다는 것은 위험천만하며 값비싼 심리적 대가를 치르는 일이다. 두번째 반응, 즉 책임 있는 선택을 하는 데 꼭 필요한 요구사항들로부터 숨어버리는 것이 점차 매력을 더해가고 있다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표현대로(『민족주의가 사라진 국가들(Nations without Nationalism)』) "벌거벗은 개인이 그러한 상태를 보상받게 해줄 원초적 안식처를 염원하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우리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때는 더 심하게 어느 때는 덜 심하게 우리 자신이 '벌거벗은 개인'의 상태임을 알아차리곤 한다. 우리는 거듭거듭 "엄청나게 단순해지길" 꿈꾼다. 각성하라는 촉구가 없으면, 우리는 그저 태아 시기의 자궁이나 벽으로 사방이 막힌 집의 이미지 속에서 영감을 얻는, 퇴행적 환상에 빠지곤 한다. 이탈과 반역이 순응의 또 다른 '이면'이듯이 원초적 안식처를 찾는 것은 책임의 '이면'이다. 원초적 안식처에 대한 갈망은 오늘날 반역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제 반역은 분별력 있는 선택요소가 되지 못한다. 피에르 로장발롱(Pierre Rosanvallon)이 지적하듯이(그의 고전적 『유토피아적 자본주의(Le Capitalisme utopique)』에서), 더 이상 "폐기하고 대체할 명령권자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적 운명론과 실업 현상의 대조가 증언하다시피 이제 반역자가 설 자리는 없는 듯하다.」*


15/08/29


* 지그문트 바우만. (2009). 액체근대. (이일수, Trans.). 도서출판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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