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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한 가벼운 자본주의 시대, 액체 근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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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한 가벼운 자본주의 시대, 액체 근대

모험러

「물론 이런 상황이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노동인생이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것은 태곳적부터 그랬다고. 그러나 오늘날의 불확실성은 경악을 금치 못할 만큼 새로운 유형이다. 우리의 생계와 장래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지도 모를 이 두려운 재앙은 쫓아버릴 수도 없는, 논쟁하고 합의하고 강제하여 얻은 조치들을 통해 단결하여 파국의 정도를 완화시킬 수도 없는 종류의 것이다. 가장 끔찍한 재앙이 제멋대로 강타하면서, 기괴한 논리로 혹은 도무지 논리랄 것도 없이 희생양을 골라 변덕스럽게 주먹을 여기저기 휘두르기에, 누가 끝장날지 누가 살아남을지 예상할 도리가 없다. 오늘날의 불확실성은 강력한 개인화의 힘이 되고 있다. 통합하기보단 분리하며, 다음날 눈을 떠보면 어떤 식으로 분리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공공의 이해'라는 개념은 점점 더 불명확해지고 실용적 가치를 송두리째 잃고 있다.


오늘늘 공포, 근심, 슬픔은 혼자 감당하게끔 되었다. 이것들이 쌓여 '공동의 명분'으로 모아지는 일은 없으며, 분명한 주소는커녕 주소란 것이 있지도 않다. 이런 상황으로 말미암아, 과거 합리적 전술로 여겨졌던 단결은 그 위상을 잃었으며 노동계급 조직들을 자기 방어적, 호전적 조직체로 만든 것과는 한참 다른 삶의 전략을 구사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현재 고용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로 인해 이미 타격을 입었거나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각종 규제가 풀린 노동과 임시직을 늘리는 방식으로 지원되는 새로운 착취 형태에 직면하여 전통적 노조운동 형식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라는 말을 수차례나 들었다. 부르디외는 최근 시작된 사태가 "과거 연대의 토대를 무너뜨렸"으며, "결속 끊기가 전투적 정신과 정치 참여의 죽음에 병행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노동의 고용은 단기적이고 변덕스러워져서 보장은커녕 확실한 장래 전망이 없는 일시적인 것이 되었고, 승진과 해고 게임에 관한 거의 모든 규정이 휴지조각이 되거나 게임이 끝나기도 전에 걸핏하면 변경되는 상황에 이르자 서로에 대한 충성과 헌신이 싹을 틔우고 뿌리내릴 가능성은 거의 없어졌다. 장기적으로 상호 의존하는 시대와는 다르게, 이제 어차피 일시적일 수밖에 없게 된 공동의 노력과 그에 따른 합의 사항들을 마련하는 지혜에 대해, 비판은 고사하고 첨예하고 진지한 관심을 촉발할 일이 드물어졌다. 고용 현장은 그저 며칠간 찾아가서 서비스를 받아보니 별로 흡족하지 않다 싶으면 언제든지 훌쩍 떠날 수 일는 야영장 같은 곳처럼 느껴진다. 이제 그곳은 공존에 필요한, 받아들일 수 있는 규정들을 만들기 위해 고생을 무릅쓰고 인내심을 가지고 임하는 공동거주지가 아니다. 세넷이 우리 시대를 "일시적 관계맺음의 형식이 장기적 결합보다 사람들에게 더 유용하다"라고 주장한 반면, 마크 그라노베터는 "취약한 유대"의 시대라고 규정했다.


오늘날의 '액화되고' '흐르고' 분산되고 흩어져 있으며 규정에서 풀려난 근대의 형식이 이혼이나 의사소통의 최종적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결속 끊기와 자본과 노동의 연계가 헐거워진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가벼운, 자유롭게 떠다니는 자본주의의 도래를 예견케 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 운명적 출발을 칭하여 결혼에서 '동거'로 옮겨가는 과정이라 할 만도 한데, 이 과정에 자연히 뒤따르는 태도와 전략적 파생물은 일시적 동거라는, 즉 동거의 필요나 욕구가 고갈되면 이 결합이 언제 어떤 이유로든 깨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한다. 함께 지낸다는 것이 서로 득이 되는 합의와 상호 의존의 문제였다면, 결속 끊기는 일방의 문제이다. 일방이라 함은, 결합의 한쪽 당사자가 늘 은밀하게 바라왔지만 어렴풋하게라도 그에 대한 속내를 드러낸 적이 없었던 자율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저 너머에 살던 '부재지주'는 실제로는 성취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자본은 과거에는 꿈도 못 꿀 새로운 이동의 자유를 통해 노동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재생산, 자본의 증대, 수익과 배당금, 주식 보유자들의 만족과 같은 일들은, 특정지역 내의 노동과 결합이 지속되어야 할 필요가 사라지면서 자율성을 얻게 되었다.」*


15/08/27


* 지그문트 바우만. (2009). 액체근대. (이일수, Trans.). 도서출판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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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리뷰, 책 발췌, 낭독, 잡문 등을 남기는 온라인 책방. 유튜브 채널 '모험러의 책방'과 ′모험러의 어드벤처′(게임) 운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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