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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러의 책방
데이비드 봄의 홀로그램 이론에 의하면 전체(우주)는 부분들의 조합이 아니며, 부분은 전체의 일부가 아니다. 부분은 전체를 담고 있고, 전체는 모든 부분에 자신을 현상한다. 아래 긴 발췌는 책 내용의 '일부'이지만 책 내용 '전체'를 포함한다. 「양자장은 모든 공간 속에 스며들어 있으므로 모든 입자들은 초공간적으로 상호연결되어 있다. 데이비드 봄이 펼쳐가고 있는 실재상은 아원자 입자들이 허공 속에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 떠도는 모습이 아니라, 그 속을 움직이고 있는 물질만큼이나 실제적이고 활발히 살아 있는 공간 속에 만물이 불가분의 그물망의 일부분으로서 아로박혀 있는 모습이다. 봄의 가장 놀라운 주장 중의 하나는, 우리의 일상 속의 감각적인 현실이 사실은 마치 홀로그램과도 같은 일종의 환영이라는 주장이다. ..
나는 맹자, 육상산, 왕양명으로 이어지는 유가의 심학(心學) 라인도 진화론적 신비주의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이 진화론적 신비주의를 가장 분명하고 종합적으로 세상에 전하고 있는 인물은 켄 윌버일 것이다. 「세상에는 본질적으로 두 종류의 신비주의가 존재한다. 오직 초월과 신성(the Light)과의 합일만을 가르치는 신비주의가 있고, 초월적인 것과의 합일을 존중하면서도 물질 속에서 은총으로 변형되는 신성이 탄생함을 강조하는 '진화론적 신비주의'가 있다. 역사는 첫 번째 신비주의가 계급제도, 불평등, 부정의와 손쉽게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신비주의에서는 세상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하거나 환상이고, 그런 세상에서 초월적인 자유를 누리는 방법은 오직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신비..
「척도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는 두 사회가 다르게 발전할 수밖에 없었던 방식이다. 서양 사회는 주로 (척도에 의존하는)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힘을 쏟았고 동양에서는 (결국 무량함을 지향하는) 종교와 철학을 중시하는 쪽으로 발전해 왔다. 이 문제를 주의 깊게 생각하면 어떤 점에서는 무량함(the immeasurable)을 으뜸가는 실재로 본 동양이 맞았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지적한 대로 척도는 인간이 만들어낸 통찰 방식이다. 인간에 우선하며 인간을 넘어선 실재는 그러한 통찰에 좌우될 리 없다. 반면 척도가 인간에 우선하며 인간과 무관하다고 보면 통찰을 객관화시켜 고정되고 변할 수 없게 만들며 결국 이 장에서 말한 조각내기와 전반적인 혼란을 불러온다. 이미 고대에 무량함을 실재로 생각한 현명한 이들은 ..
「―인간은 왜 그런 착각(자유의지가 있다는 착각)을 하도록 만들어졌나.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착각이 없다면 '나'와 '자아'가 연결될 수가 없다. 매 순간마다 수백 가지 다른 이유들로 선택을 하게 되는데 '나'라는 '자아'가 있고 그 '자아'가 이런저런 이유로 선택을 했다는 스토리를 만들면 그 스토리를 통해 연관이 없는 점들을 연결시킬 수 있다. 이렇게 점들을 연결시켜주는 선이 결국 '나'라는 자아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 자체도 사실은 착각이다.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김대식(뇌과학 전공 카이스트 교수) 인터뷰 중 「자유 의지란 단연코 환상이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고와 의도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도 없는 배경 원인으로부터 ..
마하리쉬나 마하라지 계열 영성·명상 서적에서 다 내려놓고 다 내맡기고 다 허용하라고 할 때 이러한 말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막사는 것이 다 내려놓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하고 싶고 노력하고 싶고 바꾸고 싶고 투쟁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 무언가 하고 싶고 바꾸고 싶은 마음은 왜 쉽게 판단하고 차별하는가? 하필 그런 종류의 마음만 환상이고 마야인가? 그런 마음과 행동도 허용하고 내맡기고 지켜보라. 이런 류의 책에서는 자신을 바꾸려는 노력, 욕망을 성취하려는 노력,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노력이 고통을 낳고 그러한 것을 성취해보았자 거기에는 행복이 없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반대로 아무것도 안 하려는 노력과 그냥 지금처럼 사는 것에 행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
「그러나 인도 사유의 전반적인 흐름은 바로 그것이 피해야 했던 덫에 빠져들었다. 즉, 인도인들은 대부분 마야(maya)가 추상적인 세계라는 점을 깜빡 잊고, 이를 직접 경험의 대상인 구체적인 자연세계인 줄 잘못 알았다. 이런 혼동 때문에 일체의 감각 경험을 배제한 의식을 통해서 자연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한 것이다. 마야(maya)를 감각을 통해서 투영되는 사유의 환상이라 여기지 않고, 감각 자체의 환상으로 여겼던 것이다. 더군다나 감각 경험이 영적 통찰력을 획득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라 여겨서, 감각 경험을 의식으로부터 배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요가를 개발했다. 이 요가로 단일한 대상에 대한 지속적이고 배타적인 집중력 ― 바로 무명(avidya)! ― 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