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극단 (7)
모험러의 책방
「에너지는 언제나 평형을 향해 달려간다는 열역학적 통찰이 옳다면, 지식을 통한 사회 변화와 사회 변화를 정당화하는 지식들에도 마찬가지의 유비를 해볼 수 있다. 어느 한 입장이 극단화되면 결과적으로 그 반대의 극단으로 옮겨감으로써 균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혁명은 인간의 평등한 권리를 천명하며 새로운 질서가 태어나게 했지만, 그 혁명의 과정이 빚어낸 무질서는 역설적으로 인간 이성의 계획이 아직은 크게 부족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것은 부르주아의 정치성을 가지고 설명해도 되고,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의 소박성으로 설명해도 된다. 산업혁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는 오늘날의 풍요를 가능케 했지만, 이 풍요는 수많은 사람의 희생을 통해 얻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희생의 메커니즘은 여전히 지구 어딘가에..
「한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키웠으나 호랑이가 밖으로부터 그를 먹어버렸고,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외면을 키웠으나 질병이 그를 내부로부터 공격했다. 이 둘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의 배후에서 어슬렁거렸던 불운을 후려쳐 물리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진정으로 생명을 보양하는 길은 그러므로 이 두 극단 사이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중용이 단순히 은둔적 삶과 사회적 삶이라는 두 극단으로부터 동등한 거리에 있는 것으로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양 극단의 삶으로부터 단순히 등거리만 유지하는 삶은 불가피하게 고정화해, 삶을 쇄신시키지는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새롭게 거듭남의 기술은 이 두 극단을 번갈아 채택하는 것이다. 공자(보통 장자는 공자를 냉소적으로 묘사하지만, 여기에서는 분명히 중용의 ..
선생님(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가운데의 하찮음(中庸)이 덕이 되니 그 얼마나 지극한가! 백성들은 오래 유지하는 일이 드물구나."(옹야/29) 「이 한 마디! 좁게는 유가사상의, 넓게는 동양정신의 정수를 이루는 중용론의 남상(濫觴)은 이처럼 소박한 모습을 지닌 한 마디였다. 이제 이 짧은 단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어떻게 이 보잘것없는 한 마디가 그토록 커다란 파장을 만들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 "중용이 덕이 된다" ― 우선 이 첫 마디야말로 범상치 않은 구조를 하고 있다. 이 말은 지(之)자를 중심으로 중용(中庸)과 위덕(爲德)이 강렬한 대비 효과를 발하며 극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만약 우리가 이 말에서 그러한 극적 효과를 읽지 못한다면 그것은 중용이라는 것에 대해 우리가 이미 "중(中)은 ..
선생님(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중행(中行)을 얻지 못하고 간여하면 반드시 과격해지거나 완고해진다. 과격한 자는 나아가 취하려 하고 완고한 자는 하지 않는 바가 있다."(자로/21) 「공자는 한 인간은 자신의 안에서 이루어 놓은 것 이상의 것을 자신의 바깥에서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나아가 취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벗어나서 자신의 바깥에서 찾는 것을 말한다. 즉, 이미 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정당한 자리를 벗어나서 정당하지 않은 자리에서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시도되는 소모적 추구다. 그것은 훌륭한 뜻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어떤 새로운 것도 생산할 수 없는 헛된 수고(徒勞)에 그치고 만다. 반면 견(狷)이라 하는 것은 그릇된 현실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바탕으로 자기 자신을 그에 물..
「이들과 환경운동의 이데올로기적 주도권을 다투는 사람들이 자칭 근본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이 사회를 기술 이전의 중세주의와 금욕주의로 몰고 가려고 한다. 그들은 생태신학자들이며 그들의 일부 견해는 종교적 과격파의 사고방식과 연결되어 있다. 이 생태 신학자는 환경오염에 대한 기술적 구제방법이 없으므로 인간은 산업주의 이전의 빈곤상태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도록 운명 지워져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전망을 저주가 아닌 축북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들은 중세 이후 자취를 감췄던 종교적 세계를 부활시키고자 한다. 환경보호운동은 이를 위한 편리한 수단일 뿐이다. ...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최초에는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살면서 자연을 숭배했던 생태적 황금시대가 있었다. 산업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인류는 에덴동산..
「공산주의 또는 극단적 자유주의는 가장 낮은 공통요소를 위해 탁월함을 희생한다. 모두가 똑같이 그리고 완전히 소중하게 대해져야 하기 때문에 그 어떤 개인적 성장도 요구하지 않는 궁극의 관대한 사회로서, 성장 피라미드의 바닥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 윗부분을 벗겨 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모두를 똑같이 타락하게 한다. 파시즘[또는 극단적 보수주의]는 정확히 그 반대다. 피라미드의 윗부분을 위해 바닥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초인을 향한 성장을 위해 열심히 노력할 때, 열등하다고 파악된 사람들에게는 옳건 그르건(사실 언제나 그르다) 가스실이 기다리고 있다.」* 13/11/17 * 켄 윌버, 에서 인용 켄 윌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