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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흥미를 북돋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모험러
오늘 참인 진리가 내일은 거짓일 수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진리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진리의 가치는 우선 흥미롭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이 기쁨으로 인해 세계는 새롭게 전진한다. 

「명제를 단순히 판단의 소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주 안에서의 명제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치명적이다. 순수한 논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비순응적 명제는 그릇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보다도 더 나쁘다. 그러나 그러한 명제의 기본적인 역할은 세계가 새로움으로 전진해 갈 수 있게 길을 터 주는 것이다. 오류는 우리가 진보를 위해 치르는 대가인 것이다.

지나치게 주지주의적(overintellectualized) 성향을 띤 철학자들을 지배하고 있는 논리학에의 관심은 사물 본성에 있어서의 명제의 주요 기능을 모호하게 하여 왔다. 명제는 근본적으로 믿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무의식적인 물리적 수준에서의 느낌을 위한 것이다. 명제는 느낌을 낳는 원천이며, 이 느낌은 단순히 여건(datum)에 구속되지 않는다. 불행히도 '명제'는 논리학자들의 손에 넘겨지고 말았으며, 그들은 명제가 그 진위와 관련하여 판단된다는 학설을 장려해 왔다.

명제를 일차적으로 논리학과 결부시켜 고찰했다는 사실, 그리고 참인 명제를 도덕주의적으로 선호했다는 사실은 현실 세계에서의 명제의 역할을 불분명한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논리학자들은 명제의 판단만을 논할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어떤 철학자들은 사실상 명제와 판단을 구별하지 못하며, 대부분의 논리학자들은 명제를 판단의 단순한 부속물로 보고 있다.

그 결과 거짓 명제는 부당하게 취급되어 쓰레기처럼 버려지고 무시되어 왔다. 그러나 실재 세계에서는 명제가 참이라는 것보다 명제가 흥미를 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진리의 중요성은 그것이 흥미로움을 증가시킨다는 데에 있다.

여기서 내가 설정하고 있는 학설에서는, 명제의 실현에 있어 '판단'이 구성 요소가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의식' 또한 그렇다고 본다. 풍부한 사상이 깃들어 있는 문학 작품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논리학자들에게는 그들의 편협한 학설이 불합리하다는 데 대한 경고가 되었어야 마땅하다. 모든 논리학자들이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 ... " 라는 대사를 읽을 때, 맨 처음 명제가 참이냐 거짓이냐를 판단하는 것으로 시작해서는, 35행 전체에 걸쳐 계속 판단을 내린다고 보기는 어렵다. 틀림없이 계속 읽어 나가는 어떤 시점에서 판단은, 미적인 기쁨으로 뒤덮여 빛을 잃게 된다. 이 연극 대사는 극장의 관중들에게는 단순히 느낌을 위한 유혹인 것이다.

또 강렬한 종교적 감정을 생각해 보자. 기독교인이 복음서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다고 하자. 그는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단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 말씀의 가치를 느낌의 요소로서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는 가치에 대한 그의 깨달음을 진리 판단의 토대로 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절차는, 명제의 일차적 기능이 판단의 요소가 되어야 한다는 데 있는 것이라면 불가능하다.

명제의 일차적 기능은 느낌에의 유혹(lures for feeling)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유기체 철학의 기본 학설이다. 명제는 농담을 즐기기 위한 형식을 갖고 있을 수도 있고, 공포, 혐오, 분노 같은 느낌들로 이루어진 형식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

14/11/29

* 도널드 셔번,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 입문>에서 발췌, 편집,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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