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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와 권태의 치명적 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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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든 개탄의 와중에 프랜시스 후쿠야마 자신도 역사의 종착점에 놓인 삶에 관해 극심한 양가감정을 보였다는 점은 잊히곤 한다. 그의 논문에 담긴 우울한 어조의 마지막 문단은 통째로 인용할만한 가치가 있다.


역사의 종언은 매우 슬픈 시간이다. 인정을 구하는 투쟁, 순수하게 추상적인 목적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거는 자세, 대담성·용기·상상력·이상주의를 촉구하는 전 지구적 이데올로기 투쟁은 경제적 이해타산, 끊임없는 기술문제의 해결, 환경에 대한 우려, 까다로운 소비자의 수요 충족에 자리를 내줄 것이다. 탈역사의 시대에는 예술도 철학도 없고 그저 인류 역사를 담은 박물관을 영원히 관리하는 일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나는 스스로의 내면에서,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서, 역사가 존재했던 시절에 대한 강한 향수를 느낀다. 그런 향수는 탈역사의 시대에도 얼마간 존속하면서 경쟁과 갈등에 불을 지필 것이다. 나는 그 불가피성을 인식하면서도 1945년 이래 유럽에서 생성된 문명과 북대서양과 아시아에 퍼진 그 갈래에 관해 깊은 양가감정을 느낀다. 어쩌면 역사의 종착점에서 예상되는 수세기에 걸친 권태가, 역사를 다시 한 번 출발시키는 데 기여할지 모른다. 


… 공산주의가 몰락한 지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역사 속에 우리를 계속 비끄러매놓는 것은 향수와 권태의 결합임이 명백하다. 싸워 쟁취할 이상이 존재하던 시대, 그러기 위해 대담성과 용기와 명예가 필요했던 시대에 대한 향수, 자동차 도난 방지나 주거 침입 방지보다 더 숭고한 목적을 위해 목숨 바칠 것을 요청받던 시대에 대한 향수,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와 소비자본주의가 남기는 잉여에 대한 권태, 너무 심대해서 공포스러울 지경인 권태. 어찌 됐든 냉전시대의 사상적 안정감을 그리워하는 유럽 일부 지역의 현상에 대해선 염려를 하는 것이 맞다 쳐도, 진짜 우려해야 할 일은 권태와 테러리즘의 치명적인 조합이다.」*


16/06/14


* 앤드류 포터,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진정한 나를 찾다가 길을 잃고 헤매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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