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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장, 명구절

한국에서 순수한 학문연구는 환영받지 못한다

모험러

「한국에서 학문을 한다면 역설적이게도 진정성 있는 학문적 자세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다. 왜? 서구이론을 비판하고 넘어서려는 노력을 해본들 현학적입네, 추상적입네 하는 핀잔을 듣기 일쑤이고, '현실 적합성 부재'나 '실천할 수 없는 현학'이라는 난도질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구이론을 비판하고 넘어서려는 끈질긴 노력은 결국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것이 부르디외가 '글로벌 상징공간에서의 투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읽고 또 읽고,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고, 행간의 심연을 응시하고, 궁극적으로 '비판적 이해'에 도달하는 과정, 이 모들 것들이 시간과 투자를 요하는 작업이다. 이런 진입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는 글로벌 상징공간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어렵고 그들과 게임을 할 수도 없다. 그들의 작업을 두루두루 꿰지 않고는 투쟁도 극복도 독창적 이론도 모두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순수한 학문연구를 무시하는 풍토에서 지식장의 자율성을 기대할 수 없고, 그러다보니 지식장 밖에서 추대한 사회과학의 가짜 거장들이 판치는 난국이 형생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학문적으로 뛰어난 학자가 지적 리더십을 발휘해 학계를 끌어가고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서구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모험을 감행하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사회과학이 대중과 호흡해야 한다는 뿌리 깊은 강박은 한국 사회과학을 시사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나 대중적 흥미를 채워주는 학문으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독립적인 자율적 지식장'에서 생산되는 사회과학지식과 일상지식 간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사회과학자의 임무인 양 착각하게 했다. 눈앞에서는 한국적 이론 구축을 주장하면서 뒤로는 이론과 실천의 경계 허물기에만 여념이 없는 상황에서 독창적 이론이 나올 가능성은 아예 없는 것이다. 지난 반세기 넘게 한국적 이론을 외쳐왔음에도 아무 결실을 못 거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부르디외가 말한 것처럼 "학문은 실천과 거리를 둔 '관조적 자세'(contemplative attitude)를 취해야" 가능한 일이건만, 이론과 실천의 경계를 허물어뜨린 우리는 이론을 만들어내기 위한 스콜레(학자적 관점)로 구성된 자율적 상징공간을 형성하는 데 당연히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아니, 실패란 말도 어폐가 있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 학자들 대부분은 독립된 상징공간에 몰입해 이론을 만들어낼 시도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빠르게 변하는 국내의 정치이슈와 시사현안에 천착하고, 거기서 얻는 대중적 명성에 집착해온 우리의 사회과학자들은 글로벌 상징공간의 어떤 '이론적' 전통에도 속할 수 없는 미아가 되고 말았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우리는 앞으로도 어떤 이론적 전통도 갖지 못한 채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고, 우리의 학문은 대중의 교양적 수준(상식)을 벗어나지 못한 채 낮은 평지만을 답보할 수밖에 없다.」*


15/07/25


* 김경만. (2015).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한국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 문학동네. 발췌,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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