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러의 책방
데이비드 봄의 홀로그램 우주 본문
데이비드 봄의 홀로그램 이론에 의하면 전체(우주)는 부분들의 조합이 아니며, 부분은 전체의 일부가 아니다. 부분은 전체를 담고 있고, 전체는 모든 부분에 자신을 현상한다. 아래 긴 발췌는 책 내용의 '일부'이지만 책 내용 '전체'를 포함한다.
「양자장은 모든 공간 속에 스며들어 있으므로 모든 입자들은 초공간적으로 상호연결되어 있다. 데이비드 봄이 펼쳐가고 있는 실재상은 아원자 입자들이 허공 속에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 떠도는 모습이 아니라, 그 속을 움직이고 있는 물질만큼이나 실제적이고 활발히 살아 있는 공간 속에 만물이 불가분의 그물망의 일부분으로서 아로박혀 있는 모습이다.
봄의 가장 놀라운 주장 중의 하나는, 우리의 일상 속의 감각적인 현실이 사실은 마치 홀로그램과도 같은 일종의 환영이라는 주장이다. 그 이면에는 존재의 더 깊은 차원, 즉 광대하고 더 본질적인 차원의 현실이 존재하여, 마치 홀로그램 필름이 홀로그램 입체상을 탄생시키듯이 그것이 모든 사물과 물리적 세계의 모습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봄은 이 실재의 더 깊은 차원을 '감추어진(implicate, 접힌enfolded)' 질서라고 하고, 우리의 존재 차원을 '드러난(explicate, 펼쳐진unfolded)' 질서라고 부른다.
그가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는 우주의 모든 현상들의 나타남을 이 두 질서 간의 무수한 접힘과 펼쳐짐의 결과라고 보기 때문이다. 예컨대, 봄은 전자를 한낱 물체라고 믿지 않고 전 공간에 펼쳐진 하나의 총체(totality), 혹은 조화체(ensemble)라고 믿는다. 어떤 장치가 하나의 전자의 존재를 탐지한다면 그것은 단지 전자의 조화체의 한 측면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마치 글리세린 속의 특정한 위치에 잉크 방울이 펼쳐지듯이 말이다. 전자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와 같은 일련의 연속적인 접힘과 펼쳐짐 때문인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전자와 기타의 모든 입자들은 간헐천에서 솟아나오는 물줄기의 모습보다 조금도 더 실재적이거나 영속적이지 않다. 입자들은 감추어진 질서로부터의 지속적인 유입물에 의해 지탱되며, 한 입자가 소멸되는 것처럼 보일 때도 그것은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나타났던 곳인 더 깊은 질서 속으로 접혀 들어가는 것일 뿐이다. 한 장의 홀로그램 필름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입체상 또한 감추어진 질서와 드러난 질서의 한 예다. 필름은 감추어진 질서다. 왜냐하면 필름의 간섭무늬로 암호화된 이미지는 전체에 걸쳐 졉혀들어 있는 감추어진 총체이기 때문이다. 필름에서 투영된 홀로그램은 드러난 질서다. 왜냐하면 그것은 펼쳐진, 인식가능한 형태의 이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두 질서 간의 연속적인 교번의 흐름은 포지트로늄 원자 속의 전자와 같은 입자들이 어떻게 한 종류의 입자에서 다른 종류의 입자로 변신할 수 있는지 설명해준다. 그러한 변신은 예컨대 전자와 같은 하나의 입자가 다시 감춰진 질서로 접혀들어가고 한편으로는 다른 입자, 즉 광자가 펼쳐져서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또 양자가 어떻게 입자나 파동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지도 설명해준다. 봄에 의하면 두 가지 측면 모두가 양자 조화체(quantum's ensemble) 속에 깃들여 있다. 다만 관찰자가 그 조화체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이 어떤 측면이 펼쳐지고 어떤 측면이 접혀 있도록 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이처럼 양자가 취하는 형태를 결정하는 데 관찰자가 하는 역할은 보석세공가가 보석을 가공하는 방식에 따라서 보석의 어떤 면은 드러나고 어떤 면은 감춰지는 사실보다 조금도 신비할 게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홀로그램'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정지된 이미지를 나타낼 뿐, 매순간 창조해내는 영원히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 우주의 성질을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봄은 우주를 홀로그램이라고 묘사하기보다는 '홀로무브먼트(holomovement)'라고 부르기를 더 좋아한다.
홀로그램 방식으로 조직된 더 깊은 차원의 질서가 존재한다는 가설은 또 아양자 차원에서는 실재(reality)가 초공간적인 성질을 띄게 되는 이유도 설명해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어떤 것이 홀로그램 방식으로 조직되면 위치라고 하는 모든 겉껍질은 무너진다. 홀로그램 필름의 모든 부분들이 전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담고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사실 정보가 필름 위에 초공간적으로 편재해 있음을 말하는 다른 표현방식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주의 구조가 홀로그램 원리로 되어 있다면 우주 또한 초공간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우리를 가장 아연케 하는 것은 봄이 완전히 전개해놓은 전일성에 대한 사상이다. 봄은, 우주 속의 만물이 감추어진 질서의 이음새 없는 홀로그램적 직물로 짜여 있으므로 우주를 '부분'들의 조합으로 보는 것은 간헐천에서 솟아나오는 물줄기를 그 샘물과 분리된 것으로 보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다고 믿는다. 전자는 '기본입자'가 아니다. 그것은 홀로무브먼트의 한 측면에 붙여진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실재를 부분들로 나누고, 거기에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인습의 산물이며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장식 카페트 속의 다양한 문양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아원자 입자들, 그리고 우주 속의 다른 모든 것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것은 서로 매끈히 이어져 있으며 그가 시공간 연속체라고 이름붙인 더 큰 전체의 부분들이라는 것이었다. 봄은 이러한 생각에서 한 발 더 크게 도약한다. 그는 우주의 '삼라만상'이 단일 연속체의 부분들이라고 말한다. 드러난 질서 속에서는 사물들이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낱낱의 사물은 다른 만물의 이음새 없는 연장이며, 궁극적으로는 감추어진 질서와 드러난 질서 그 자체조차도 서로 하나로 융합되어버린다.
다음을 잠시 살펴보자. 당신의 손을 살펴보라. 이번에는 당신의 옆에서 비치는 램프의 빛줄기를 바라보라. 그리고 발 밑에 엎드려 있는 개를 바라보라. 당신은 단지 이들과 동일한 무엇으로써 만들어지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그 동일한 그것이다'. 나뉘지 않는, 하나의 엄청나게 거대한 무엇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 원자, 쉼없는 대양, 그리고 우주 속의 깜박이는 별들 속으로 무수한 팔을 뻗쳐 있는.
봄은 이것이 우주가 하나의 거대하고 획일적인 덩어리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사물은 나뉘지 않는 전체의 일부분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지닐 수 있다. 그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강물 속에 흔히 나타나는 소용돌이 물결을 예로 든다. 얼핏 보면 이런 소용돌이 물결은 별개의 존재로 보이고 개체적인 많은 속성 ― 규모, 유속, 회전방향 등등 ― 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주의 깊게 살펴보면 하나의 소용돌이 물결이 어디서 끝나며, 어디서부터가 강물인지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러므로 봄은 '사물'들 간의 차이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홀로무브먼트의 다양한 측면들을 분리시키는 것은 언제나 임의적인 관념, 즉 그러한 측면들을 우리의 인식 위에 두드러지게 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임을 항상 알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는 이것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로서, 홀로무브먼트의 서로 다른 측면들을 '사물'이라고 부르는 대신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아총체(relatively independent sutotalities)'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봄의 홀로그램 우주는 양자물리학이 물질을 깊이 파고 들어갈 때 상호연결성의 예를 그토록 자주 발견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수수께끼들도 한꺼번에 풀어준다. 그 중 한 가지는, 의식이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아원자 세계에 대한 영향력이다. 앞서 보았듯이 봄은 입자가 관찰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는 본질적으로 의식과 물리학을 한데 묶는 일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그것을 그릇된 방식으로, 즉 다시금 실재를 쪼개어 하나의 분리체인 의식이 또 다른 분리체인 아원자 입자와 상호작용한다는 식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그러한 모든 것들이 홀로무브먼트의 다른 측면들이기 때문에 그는 의식과 물질이 상호작용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 어떤 의미에서는 관찰자가 관찰되는 것이다. 관찰자는 또한 측정장치이자, 실험결과이자, 연구소이자, 연구소 밖을 지나가는 산들바람이다. 사실 봄은 의식이 좀더 미묘한 형태의 물질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 둘 간의 모든 관계의 토대는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현실차원이 아니라 감추어진 질서의 깊은 밑바닥에 깔려 있다고 믿는다. 의식은 모든 물질의 다양한 심도의 접힘과 펼쳐짐 속에 존재하며, 그것이 아마도 플라스마가 생명체적인 성질을 일부 지니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봄은 말한다. "형체에 활동력을 불어넣는 것은 마음이 지닌 가장 특징적인 성질이며 우리는 이미 전자에서 마음과 비슷한 어떤 것을 발견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우주를 생물과 무생물로 나누는 것 또한 무의미한 일이라고 믿고 있다. 생물과 무생물은 불가분하게 서로 엮어져 있고 생명 또한 우주라는 총체의 전반에 깃들여 있다. 바위조차도 어떤 의미에서는 살아 있다. 왜냐하면 생명과 지능은 모든 물질뿐만 아니라 '에너지', '공간', '시간', '전 우주를 이루고 있는 직물', 그리고 우리가 홀로무브먼트로부터 추상해내어 분리된 사물로 오인하는 기타의 모든 것들 속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봄은 말한다.
의식과 생명이(그리고 진실로 만물이) 우주 전체에 깃들여 있는 조화체라는 사상에는 그에 못지않게 눈부시도록 놀라운 이면이 숨어 있다. 즉, 홀로그램의 모든 부분들이 전체상을 담고 있는 것과 똑같이 우주의 모든 부분이 전체를 품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접근할 방법만 안다면 왼손 엄지손톱 속에서 안드로메다 은하계를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우리는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를 처음 만나는 장면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원리상으로는 모든 과거와, 미래를 시사하는 모든 내용들이 시공간의 미세한 영역 구석구석에도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낱낱의 세포들도 그 속에 우주를 품고 있다. 모든 나뭇잎과 빗방울, 낱낱의 티끌 또한 그러하여서, 윌리엄 블레이크의 이 유명한 시구에 새로운 의미를 더해준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우주를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보려거든,
그대 손바닥 손에서 무한을
한 시간 속에서 영겁을 붙잡으라.
우리의 우주가 더 깊은 질서의 한갓 창백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 현실의 씨줄과 날줄 속에는 그 이상의 또 무엇이 숨어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해 봄은 한 가지 사실을 제시한다. 현재의 물리학적 이해에 의하면 공간의 모든 영역이 다양한 파장의 파동으로 이루어진, 상이한 종류의 장들로 가득 메워져 있다. 그 각각의 파동들은 언제나 최소한 일정량의 에너지를 갖고 있다. 하나의 파동이 지닐 수 있는 최소한의 에너지를 계산했을 때, 물리학자들은 '1㎤의 빈 공간마다, 알려져 있는 우주 속의 모든 물질의 에너지 총합보다 더 큰 에너지가 담겨 있음'을 발견했다.
어떤 물리학자들은 이 계산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거기에는 틀림없이 어떤 오류가 있다고 믿는다. 봄은 이 무한한 에너지의 대양이 실제로 존재해서 우리에게 감추어진 질서의 광대하고 신비한 성질에 대해 최소한 약간은 귀띔을 해주고 있다고 믿는다. 그는 많은 물리학자들이 이 엄청난 에너지 대양의 존재를 무시해버리는 것이, 마치 물고기가 자신이 헤엄치고 다니는 물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애초부터 이 대양 속을 떠다니는 부유물들, 즉 물질에만 관심을 기울이도록 교육받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빈 공간이 그 속을 움직이고 있는 물질만큼이나 생생하고 다양한 작용으로 가득 차 있다는 봄의 견해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대양에 대한 그의 사상 속에 완숙하게 드러나 있다. 물질은 흔히 허공이라고 불리는 이 대양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물질은 공간의 일부분이다. 그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봄은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든다. 절대온도 0도로 냉각된 결정은 전자의 흐름을 산란시키지 않고 통과시킨다. 온도를 올리면 결정 속의 온갖 불순물들이 투과성을 잃고 전자를 산란시키기 시작한다. 전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러한 불순물들은 무(無)의 바닷속에 떠 있는 '물질'의 조각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무와 물질의 조각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동일한 직물, 즉 결정의 심층적 질서 속의 일부인 것이다.
봄은 이것이 우리의 존재 차원에서도 똑같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공간은 비어 있지 않다. 그것은 '꽉 차' 있다. 그것은 진공의 반대인 충만(plenum)이며 우리를 포함한 만물의 존재 기반이다. 우주는 이 에너지의 우주적 대양으로부터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우주는 그 표면 위의 한 물결, 상상할 수 없이 광대한 대양 속의 작은 '파문'이다. "이 파문은 비교적 자생적이어서 안정적으로 비슷하게 되풀이하여 재현되는, 다른 것들로부터 구분하여 인식할 수 있는 그림자를 현상계라는 3차원의 드러난 질서 속에 비추어낸다"고 봄은 말한다. 달리 말하자면 우주는 우리가 보듯이 그 분명한 물질적 성질과 엄청난 크기에도 불구하고 홀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보다 훨씬 더 광대무변하고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주는 이 광대무변한 그것의 중요한 소산도 아니고 단지 지나가는 그림자, 만물의 확대된 조망속에서는 한낱 한 번의 딸국질 정도에 지나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이 무한한 에너지의 바다도 감추어진 질서 속에 깃들여 있는 것의 전부가 아니다. 감추어진 질서는 우리 우주 속의 만물에 탄생을 안겨준 바탕이므로 그것은 또한 최소한 과거에 있었던, 그리고 앞으로 존재할 모든 아원자 입자들, 모든 형태의 물질과 에너지, 생명, 그리고 가능한 형태의 모든 의식, 퀘이서(quasars)로부터 셰익스피어의 뇌에 이르기까지, DNA로부터 은하계의 크기와 모양을 결정하는 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조차 그것이 담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의 전부는 아니다. 봄은 감추어진 질서가 사물의 종국이라고 믿어야 할 이유도 없다고 본다. 그 너머에는 상상하지 못한 차원들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끝없이 펼쳐지는 무한한 차원들이······.」*
15/02/25
* 마이클 탤보트, <홀로그램 우주>에서 발췌, 편집.
'명문장, 명구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나친 효율은 위험을 높인다 (0) | 2015.03.03 |
---|---|
소설과 게임 (0) | 2015.02.28 |
책보다 사람을 (0) | 2015.02.27 |
홀로그램 속의 홀로그램 (0) | 2015.02.23 |
고대의 다중우주론 (0) | 2015.02.23 |
관심이 운명을 만든다 (0) | 2015.02.22 |
작가는 그냥 쓴다 (0) | 2015.02.13 |
모험러의 책방
서평, 리뷰, 책 발췌, 낭독, 잡문 등을 남기는 온라인 책방. 유튜브 채널 '모험러의 책방'과 ′모험러의 어드벤처′(게임) 운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