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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러의 책방
「먼저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이념의 기능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구에서 정체나 선거 정책과 관련해서 모델화는 일반적이며, 이런 점은 서구적 근대성을 수용한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줄리앙은 정치 영역에서 모델화의 특수한 기능을 강조한다. 정치 영역에서 정책이나 이념을 제시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의 실현을 위해서가 아니다. 사람들은 상황이라는 변수가 나타나며 따라서 모든 이념이 그대로 실행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념이나 모델의 제시는 적용이 아닌 협의를 위해서다. 모델화는 민주주의의 원리다. 정책 모델을 구상하고 제시하는 것은 정책 모델을 완벽하게 이행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것에 대해 토론하고 입장을 취하며 반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책 모델은 논쟁을 조직하는 데 사용된다. 결국 이념..
「서구 전통 사상은 모델화의 역사다. 서구적 전략은 모델화의 치밀성에 달려 있다. 실현할 대상을 행동하기 전에 관념적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모델화의 전통은 이념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념의 전통은 그리스 사상이 불완전한 현실을 넘어선 초월적 세계를 지시하기 위해 선험적 관념을 설정한 것에 뿌리를 둔다. 이념은 실천해야 할 이상이고 목적이다. 이념 추구 성향은 기독교로 계승되고 서양 근대에 와서 과학과 자유주의의 확립으로 이어졌다. 약 2세기 전 중국은 이념 또는 모델화 전통을 앞세운 서구적 근대성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현대 중국의 위상은 세계 전체의 미래와 직결될 정도로 중요해졌지만 동시에 중국은 전통사상과 서구적 이념 간의 갈등을 처리해야 할 과제를 떠안고 있다. 줄리앙의 전략론은 이런 문제의식을..
「지금까지 나는 교수가 강의실에서 자기 개인의 가치관적 입장의 강요를 피해야 할 실제적 이유에 대해서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확고하게 주어진 것으로 전제된 목적에 대한 수단을 논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실천적 입장을 옹호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훨씬 더 깊은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란 세계의 다양한 가치질서들이 서로 해소될 수 없는 투쟁 속에 있기 때문에 실천적 입장의 학문적 옹호는 원칙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사실이 바로 그 더 깊은 이유입니다. 제임스 밀이 언젠가, "만일 우리가 순수한 경험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다신교에 도달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나는 그의 철학을 다른 점에서는 높이 평가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이 점에서는 그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
「한국에서 학문을 한다면 역설적이게도 진정성 있는 학문적 자세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다. 왜? 서구이론을 비판하고 넘어서려는 노력을 해본들 현학적입네, 추상적입네 하는 핀잔을 듣기 일쑤이고, '현실 적합성 부재'나 '실천할 수 없는 현학'이라는 난도질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구이론을 비판하고 넘어서려는 끈질긴 노력은 결국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것이 부르디외가 '글로벌 상징공간에서의 투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읽고 또 읽고,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고, 행간의 심연을 응시하고, 궁극적으로 '비판적 이해'에 도달하는 과정, 이 모들 것들이 시간과 투자를 요하는 작업이다. 이런 진입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는 글로벌 상징공간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어렵고 그들과 게임을 할 수도 없..
「민족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이 밝혀낸 사실은 선사시대 원시사회의 전쟁이 현대의 전쟁 못지 않았고, 참혹했으며, 또 '효과적'이었다는 것을 너무나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나무를 깍은 창으로 싸우건 네이팜탄으로 싸우건 간에 전쟁은 어디에서나 지옥인 것이다. 진정으로 평화로웠던 국가 이전의 사회는 드물었다. 전쟁은 상당히 자주 일어났고, 대개의 성인 남자는 사는 동안 전쟁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 사실 원시전쟁은 문명시대 전쟁보다 훨씬 자주 일어났고 무자비하게 진행된 까닭에 문명시대의 전쟁보다 훨씬 치명적이었다. 현재 서양의 자책 분위기가 자아낸 원시전쟁에 대한 신화 만들기는 학적·과학적인 관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며, 실용적·도덕적 차원에서도 개탄스러운 현상이다. ... 평화로운 과거를 상정하는 사상들은 ..
「근대성이란 인류문명의 합작품이었지 특정 문명이나 지역의 특산물, 독점재가 아니었다. 근대성의 미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초기근대, 즉 역사적 근대가 송원 연간에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은 고전적 근대성과는 완전히 다른 근대성 개념을 전제한 것임을 유념해주기 바란다. 서구기원론을 중국기원론으로 바꿔놓은 것, 즉 같은 게임을 하되 선두를 바꿔서 하자는 식이 아니다. 중층근대성론은 어느 특정 지역, 문명권에만 보편성이 점지되어 있다는 고전적 근대성론의 신화와 단호히 절연한다. 송원 연간의 초기근대는 당시 그 지역이 문명 교류의 주요 교차점이자 진원이었기에 가능했다. 이론적으로 보면 초기근대란 원형근대성의 배경을 가진 어떤 문명권에서라도, 문명 교호의 내외적 교직 맥락이 맞아 떨어졌을 때, 출현 가능한 일..
「정주학(또는 주자학)의 이기론(理氣論)은 이러한 정황 속에서 출현했다. 이-기의 명확한 준별이 새롭다. 한당 시기까지 중국적 사유에서 이 양자는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다. 세계는 천(天, 유교), 진(眞, 불교), 도(道, 도교)의 신성함 속에 잠겨 있었다. 즉 성이 속을 통섭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정주학에서 세계는 기로 이루어지고 기에서 이(理)가 분리된다. 정주학에서 이는 내면화된 윤리 개념이다. 이제 이는 기의 바다 속에서 힘써 탐구하여 찾아야만 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제 자연과 사회질서가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으로 표상되지 않고 그 속에서 작동되어야 할 이(理)의 원리가 발견되고 구성되어야 한다. 정주학의 완성자인 주희는 지층과 화석에 근거한 우주진화론을 생각했고 자연 관측을 위한 기계 설계에..
근대성은 인류문명의 합작품이지, 서구문명의 독점 발명품이 아니다. 이 주장을 담은 김상준 선생의 책 은 유교와 동아시아를 포함, 세계 역사와 문명을 바라보는 내 관점을 뒤흔들어놓았다. 켄 윌버 저서들 이후로 가장 강렬한 지적 자극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허무주의와 비관주의를 넘어 근대성의 의미를 새로 발굴·해석하고 인류 문명의 공생적·윤리적 진화를 다시금 꿈꿀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켄 윌버와 김상준의 프로젝트는 공명하는 부분이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론(쉽게 말해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스토리)은 삶의 태도와 방향을 규정한다. 밝은 비전을 품고, 더 건강하고 쾌활하게 살아가고 싶다. 큰 학자들의 좋은 스토리들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근대문명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도 일종의 유럽물신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