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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러의 책방
「이상주의나 영원주의의 뱃멀미를 이기는 최고의 방법은 단단한 땅에 대한, 항구에 대한 모든 희망을 단번에 버리는 것이다. 도덕 안에 그런 항구가 있는지 의심스러워했던 파스칼의 말에 따르면, 배를 탈 사람이 누구인지를 판정하는 항구 말이다. 여기에서 도원 선사가 그리고 있는 과감한 항해사는 더 이상 고정된 좌표들과 굳은 확실성에 대한 욕망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자신을 물결을 따라 미끄러지게 하고, 세월을 따라 흘러가게 한다. 여정을 늦추려 하기도, 진리라는 신비의 섬에 정박하기를 바라지도 않으면서. 그러므로 피안에 서서 윤회의 동요를 바라보는 게으른 방관자였던 붓다는 삶이라는 놀이를 포기했지만, 선사(禪師)는 과정의, 생성의 진정한 영원성을 느끼기 위해서 주저 없이 대양의 부름에 응답한다. 아직도 사물..
「사실 메시아주의는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고, 항상 종교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적 메시아주의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어떤 의 존재를 정립하는데, 그런 왕국의 도래는 현실 역사의 종말을, 즉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다. 니체는 자신의 동시대인이었던 마르크스를 한 번도 인용한 적이 없다. 그렇지만 니체는 진보란 관념 자체를 거부하고, "잘못된 이념"으로 간주했다. 이는 문명의 개혁이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근대적인 '진보'라는 것이 실상 데카당스의 동의어, 인간성의 획일화와 위대한 것을 향한 모든 열망의 포기와 동의어였음을 말하는 것뿐이다. 항상 완전성을 다른 장소, 이후의 시간에 두지 말고, 초월성이 실제로 존재하는 곳에서, 즉 내재성의 한가운데에서 초월성을 찾아..
「왕부지는 을 보는 두 극단적 관점의 오류를 밝힌다. 그 오류의 하나는 을 도덕론으로서만 고찰하여 에 내포된 투시력을 간과해버리는 관점이며, 다른 하나는 을 운명서로서만 고찰하여 예견능력의 토대인 도덕적 요소를 간과해버리는 관점이다. 사실 은 다음 두 가지 측면을 갖추고 있다. 하나는, 사람은 운행으로서의 모든 생성에 내재하는 일관성의 개념 ― 연속과 변이, 시초와 성향 ― 에 의거할 때 비가시에 이를 수 있으며 그 효능성과 맺어져 경향을 탐지하고 변화를 예견할 수 있음이며, 다른 하나는 바로 생성에 관련된 모든 징후는 때로 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운행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는 반면, 정도로부터 탈선할 수도 있는 까닭에 항상 윤리적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따라서 은 사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도덕성이 ..
「모든 생성은 멈추지 않고 지속된다는 점에서 이미 조절을 내포한다. 조절은 유동성 속에서만 가능하다. 또한 내재하는 이 자극-조절의 능력은 운행의 비가시적 효능의 차원을 이룬다. 반면 비가시나 정신의 영역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면 불임성은 즉시에 야기되며, 그 결과 사물화(정체와 소멸)가 초래된다. 현자의 말도 이와 같아서, 그의 말이 단지 암기되고 인용되는 데 그친다면 더 이상 그 말의 생동한 의미의 원천인 내적 '흐름'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말해진 것이란 그 자체만으로는 (논리적 '진실'을 내용으로 하는) 가치를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말의 뜻은 현행상의 자극과 작동상의 운행 속에서만 타당성을 지닌다. 말은 '정신'을 통하여 전달될 때 비로소 그 진정성을 얻는다. 이 통행과 활성의 기능을 중시..
도전적인 과제, 명확한 목표, 직접적인 피드백이 지식과 기술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생성'하게 해준다. 이 과정에서 재능이 발휘되고 '몰입'하게 된다. 이렇게 오랜 시간 훈련과 연습이 쌓이면 그것은 '자동성'이 된다. 머리(의식)로 해석하기 이전에 몸(잠재의식)이 즉각적으로 판단하고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자동화는 뇌의 선천적인 자동성 능력을 확대해주기보다는 오히려 손상시킨다. 반복적인 정신 훈련에서 벗어나게 해주지만, 더불어 심도 깊은 학습을 하지 못하게 막는다. 지식을 생성하고, 기억력을 풍부하게 하고, 기술을 쌓아주는 실제 세계에서 벌이는 연습에 참여하지 못할수록 우리 마음에는 자동화에 대한 안심과 편향이 생긴다. 이 문제는 컴퓨터 시스템들이 우리가 하는 행동에 대한 직접적이고 순간적인 피드백을..
'소멸'도 좋지만 김상일 선생이 쓰는 '이울어짐'(perishing)이라는 번역어가 화이트헤드의 의도를 더 잘 살리는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 더 정확히는 플라톤 ― 의 생성의 학설은 소멸의 학설(doctrine of perishing)에 의해 균형잡혀져야 한다. 계기는 소멸할 때에 존재의 직접성으로부터 직접성의 비존재로 이행한다. 그러나 이는 무(無)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굽힐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모든 시간은 소멸하여, 해명을 위한 방도가 되어간다.'(Pereunt et imputantur.) 인류의 일상적 표현은 우리 과거에 3개의 양상 ― '인과성', '기억', 그리고 직접적 과거의 경험을 그것의 변형된 현재의 기초로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 을 부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