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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러의 책방
「먼저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이념의 기능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구에서 정체나 선거 정책과 관련해서 모델화는 일반적이며, 이런 점은 서구적 근대성을 수용한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줄리앙은 정치 영역에서 모델화의 특수한 기능을 강조한다. 정치 영역에서 정책이나 이념을 제시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의 실현을 위해서가 아니다. 사람들은 상황이라는 변수가 나타나며 따라서 모든 이념이 그대로 실행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념이나 모델의 제시는 적용이 아닌 협의를 위해서다. 모델화는 민주주의의 원리다. 정책 모델을 구상하고 제시하는 것은 정책 모델을 완벽하게 이행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것에 대해 토론하고 입장을 취하며 반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책 모델은 논쟁을 조직하는 데 사용된다. 결국 이념..
「『손자병법』의 영향으로 동아시아권에서 널리 회자되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의 의미도 효율성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싸우지 않고 승리한다는 것은 도덕적 관심도 아니고 막연한 추상적 담론도 아니다. "이런 '싸우지 않음'의 이상은 도덕적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단지 승리가 예정되어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이 되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다. '싸우지 않음'의 이상은 추상적 개념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가장 사소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단계에서 향후 방향이 가장 정확히 진행되는 방식에 주의가 집중되기 때문이다. 모든 이상향과 가장 동떨어진 방식으로, 모든 주어진 상황을 특징짓는 효력 있고 장악력이 있는 결과를 '단순히' 이 결과의 방향에서 유리하게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관건이다."(『사물의 성향』, 4..
「서구 전통 사상은 모델화의 역사다. 서구적 전략은 모델화의 치밀성에 달려 있다. 실현할 대상을 행동하기 전에 관념적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모델화의 전통은 이념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념의 전통은 그리스 사상이 불완전한 현실을 넘어선 초월적 세계를 지시하기 위해 선험적 관념을 설정한 것에 뿌리를 둔다. 이념은 실천해야 할 이상이고 목적이다. 이념 추구 성향은 기독교로 계승되고 서양 근대에 와서 과학과 자유주의의 확립으로 이어졌다. 약 2세기 전 중국은 이념 또는 모델화 전통을 앞세운 서구적 근대성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현대 중국의 위상은 세계 전체의 미래와 직결될 정도로 중요해졌지만 동시에 중국은 전통사상과 서구적 이념 간의 갈등을 처리해야 할 과제를 떠안고 있다. 줄리앙의 전략론은 이런 문제의식을..
「나는 중국에서 발전시킨 효능의 사유에서 중대한 한계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반면 나는 비록 모델화가 기대된 효율성의 관점 자체에서는 효과가 덜하더라도 모델화의 장점을 본다. 전략에서 효능의 사유는 적합하지만 정치에서는 맹점이 있다. 특히 프랑스의 정치 영역에서 제도뿐 아니라 선거 공약에서 모델화가 대단한 정도로 시행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선거 공약도 단기 또는 중기에 걸쳐 투영된 모델화다. 그러나 모델화를 시행하는 것은 제안된 결과를 위해서가 아니다. 정당들이 공약을 작성할 때 그것이 공약을 그대로 적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곧이어 '주변 상황들'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은 그토록 어리석지 않다. 그렇다면 정치 영역에서..
「손자나 손빈의 병법을 읽어보면 그 전략적 사유의 가장 지배적인 두 개념은 앞에서 구분한 모델화와 그 적용을 필요로 하지 않고 심지어 이런 구분을 파괴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첫째 개념은 '상황', '지세', '지형'[形]이고, 둘째는 내가 제안하는 번역으로 '상황의 잠재력'[勢]이다. 『손자병법』은 전략가에게 상황에서 출발할 것을 권고한다. 여기서 상황은 내가 미리 모델화할 상황이 아니라, 내가 이미 개입되어 있는 상황이다. 즉 그 상황 한가운데서 잠재력이 어디에 있고 또 어떻게 그것을 활용할 것인지를 내가 포착해내고자 하는 그런 상황을 말한다.」* 16/02/02 * 프랑수아 줄리앙. (2015). 전략: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 중국까지. (이근세, Trans.). 파주: 문학동네. 2016/02/0..
「내 생각에 효율성을 구상하는 그리스 방식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효율적이려면 모델의 형태, 관념적인 형태를 구성하고 이런 형태로 계획을 세우며 그것을 목적으로 설정한다. 그 후에 계획에 따라서 그리고 목적을 근거로 행동에 착수한다. 우선적으로 모델화가 있고, 그다음에 모델화는 적용을 요청한다. 이로부터 유럽의 고전 사유는 지성과 의지 두 능력이 결합한 작용을 구상하게 된다. 플라톤이 말하듯이 지성은 "최선을 목적으로 하여 구상한다." 이것이 바로 관념적 형태다. 그다음에 투영된 관념적 형태를 실재에 들여놓기 위한 의지가 투입된다.」* 「이제 문제는 다음과 같다. 물리학에서 유럽은 수학 덕분에 모델화와 그 적용을 가장 잘 활용했지만 전략 영역에서도 사정이 같을 수 있겠는가?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