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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이 버려진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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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문학 <남부군>에는 주인공이 빨치산 투쟁을 하다 끝내 '사상'을 버리고 귀순하는 대목이 있다. 그는 산에서 내려가기 전 자신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정의란 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의롭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인간의 교양이니 양식이니 하는 것들은 얼마나 허무하게 벗겨질 수 있는가? 인간이 그토록 추악한 동물이라면, 나는 무엇인가? 나는 한낱 센티멘탈리스트이며 리버럴리스트에 지나지 않는가? 결국 나는 무엇에도 철저하지 못하는 얼치기이며, 위선자이며, 비겁자이며, 이기주의자에 불과한 건가? 나는 끝내 인텔리일 뿐인 건가? 내가 단지 혁명을 위한 하나의 무기가 아니고, 조직을 위한 하나의 나사일 뿐인 것이 아니라면, 이 도로 찾은 '나'는 어떻게 생긴 사람인가?

질문을 하나둘씩 던지면서, 그는 사상에 짓눌려있던 '나'라는 감각을 되찾아간다. 잊고 있던 감각이다. 혁명의 무기에겐 의사도 감각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서서히 '무기'가 아닌 '나'를 의식하며, '아, 나도 생리를 느낄 줄 아는 살아 있는 인간이었구나'하고 말하는데, 울컥한 나는 소설 속으로 뛰쳐들어가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인간이 사는 세계로 가자. 마을 사람들이 달려들더라도 저항을 말자. 개 패듯 나를 팰지도 모른다. 다소곳이 앉아서 맞아 주자. 경찰대가 달려오거든 손을 들자. 사살당할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운명이다. 몇 억 광년을 흐르는 세월 속에서, 그건 정말 보잘것없는 일이 아닌가.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기로 하고, 논두렁길로 내려서며, 나는 다시 한 번 지리연봉을 바라보았다.
 ― 멀잖아 산맥에도 봄이 오겠지. 그렇지, 민자를 위해서도 빨리 봄이 와야지.
 
 ...
 
 아프지는 않았다. 얼룩진 눈 위에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며 나는 머릿속으로 조용히 불러봤다.
 
 "아아 자유, 그리고 어머니······"
 
 몽매에도 그리던 그것들은 아직도 아득한 곳에 있었다.」*
 
13/01/13

* 이태, 「인간이 사는 세계로」, 『남부군』에서. 장하늘, <글쓰기 표현사전>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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