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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민과 8학군 엘리트의 결합, 혹은 굴종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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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민과 8학군 엘리트의 결합, 혹은 굴종

모험러

1.

서부 지법 폭동이 났을 때, 철학자 박구용은 이번 내란은 반혁명적 성격이 있다며, 언론을 통한 여론 조성에서, 폭민의 폭동으로 나아갔다고 말했다. 전형적인 파시즘의 출현이다. 이것은 단순하게 볼 문제가 아니다. 출현한 이상 쉽게 제거되지 않고, 장기적 투쟁이 시작됐다는 의미다. 

"'폭력적인 난동을 부렸으니, 언뜻 생각하기에는, 저들에 대한 지지세력이라든가 그런 것들이 약화되지 않을까?', '저들에 대한 도덕적 비판 또는 정치적 비판이 전국민적으로 일어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파시즘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파시즘은 모든 국민을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서로의 골을, 넘어갈 수 있는 다리를 다 없애버린다. 오히려 폭력적 상황을 극단적으로 격화시킨다. 

특히 비정치적이거나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일수록, 이 사태를 빨리 해결할 수 있는 건 파시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실제로 나치도 그렇게 등장했고, 모든 파시즘이 그렇게 등장했다.

처음엔 비웃던 사람들이, 점점 폭력이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이 폭력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파시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폭력이 난무하면 도덕 감각을 상실하고, 권력 감각만 남게 된다." 

즉, 강한 쪽으로 함께하고 싶은 욕망, 힘을 숭배하게 되는 욕망.

또 윤이 탈옥했을 때, 박구용은 내란의 성격 규정을 다시 해야 한다 했다. 즉, 이 내란은 단지 윤이란 미친 일 개인의 일탈적 사건이 아니다. 그들의 물적, 혈연적, 정서적 연결망은 지배 엘리트들 사이에 촘촘히 뻗어있다.

2.

"헌재를 불지르자고 했고, 문형배 재판관을 과녁 삼아 조리돌림 했고, 헌재를 가루로 만든다고 했고, 살인예고도 했다.

그랬더니 헌법재판관들이 협박범의 요구를 하나둘씩 들어줬다.

우는 아이 젖 주는 게 아니라, 칼 들고 강도 짓 하려니 다 내 주려는 꼴이다." - 강유정 평론가

협박받아 요구를 들어주는 게 아니라면? 극우와 정서적, 사상적 공명을 하는 자들이 있어,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요구를 관철시키고 있는 거라면? 그것이 가장 두렵다. 

수사기관과 법원의 시간이 시작된 그 순간부터, 그곳에 또아리를 튼 위장한 민주주의자들이 가장 큰 공포였다. 보이지도 않고, 감시되지도 않고, 통제되지도 않고, 책임지울 수도 없는 곳에서, '법과 원칙'을 다루는 권능을 가진 그들. 

12.3 그날 보다 이후 전개 과정이 더 고통스러운 이유는, 나날이 한국 엘리트들의 정신 세계와 그들이 세상과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니들 아랫것이 아니라 우리 상전들이 무엇이 법이고 무엇이 죄고 무엇이 '공정과 상식'인지를 결정한다는 태도, 그에 따른 참을 수 없는 굴욕감.

3.

"파면할 정도로 중대하다는 논증은 훌륭한 반면, 파면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의 논증은 너무 허술하다. 결정문을 보면, [헌법 위반 정도가] 중대한 거는 맞고, 그 [헌법 재판관] 세 명을 임명 안 하면은 그 헌법재판이 무력화된다고 강하게 표현한다. 여기까지 읽어 보면, 파면 결정을 내려도 무난할 정도의 표현이다. 그런데 뒤에 나오는 논거들이 납득이 안 된다. 예를들어, 헌법 재판을 무력화할 의도가 입증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 의도를 어떻게 입증하나? 앞으로 의도라는 걸로 중대성을 판단하기 시작하면, 입증이 거의 불가능해진다. 그건 사람 심중인데 그걸 어떻게 증명하나?

원래 인용 결정을 썼다가 모종의 이유에서 급하게 기각으로 바꾸지 않았나 그게 의심될 정도다.

많은 분들이 설득력을 위해서 [헌재가] 전원일치로 가는 노력을 벌인다 이런 예측을 쉽게 하는데, 헌재는 어느 시점 이후에는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는 조직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차성한

어제 총리 기각은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그 결정문 내용에 충격이 컸다. 언론이 성향별 어쩌구 운운하는 것에서, 또 몹시 슬펐다. 왜 인간은 소위 '성향'이 다르면 150명이 200명으로 보이고, 하지도 않은 얘기로 있지도 않던 법 구멍을 친히 자발적으로 만들어주게 되는가. 그 어떤 법률도 '해석'을 들이밀며 비틀 수 있고, 그걸 그럴듯하게 합리화하는 데 평생의 기예를 발전시켜온, 권한은 많고 책임지는 일은 일절 없는 법복 입은 귀족들.

4.

"지귀연은 듣도보도 못한 논리로 윤석열을 풀어줬고 심우정은 검찰의 가장 중요한 권리를 내팽개치면서까지 즉시항고를 포기했다. 논리고 뭐고 윤석열을 풀어줘야 내란 폭도들에게 잘 보여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다는 심산이었는데, 나는 이때 정말 충격을 받았다.  
  
이게 왜 중요한 현상이냐? 8학군은 그냥 지역 명칭이 아니라 이 나라의 보수 엘리트 세력을 양산하는 지역적 계급적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네트워크로 연결돼 있다. 자녀 교육을 공유하는 모임이건, 의사들끼리의 친목 도모 클럽이건, 고위 관료들의 식사 모임이건 다양한 커뮤니티가 존재한다.

...

그런데 앞뒤 맞추는 것을 평생 업으로 산 8학군 서울법대 출신 초엘리트들이 교양이고 아비투스고 다 집어치우고 폭도들 앞에 딸랑거리기 시작했다. ... 저들이 이짓을 했다는 것은 이렇게 해도 8학군 커뮤니티에서 욕을 안 먹는 분위기, 혹은 칭찬을 받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8학군 우파가 교양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윤석열과 폭도들 편에 찰싹 달라붙기로 한 것이다.  
  
이게 얼마나 큰일이냐? 매우 큰일이다. 

... 

이런 현상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겠지만 이게 고착화되면 대한민국은 더 이상 말로 정치를 하고 법전으로 재판을 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멀어질 것이다. 길거리에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놈들에게 판사도, 검사도, 정치인도 다 무릎을 꿇는 판에 정치는 뭐에 쓰고 재판은 뭐에 쓸 것인가? 진짜 나라가 100여 일 만에 멍멍이판으로 전락했다."

- 이완배 기자 협동의 경제학

5.

어제 유일한 위로는 정계선 재판관이었다. 단, 1명. 그것이 우리의 현 주소일 것이다. 그래도 그 1명의 상식적 엘리트를 우리 사회가 길러냈다는 데, 위안을 얻는다. 

"중립적인 위치에서 법적 의무를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특검에 의한 신속하고 공정한 수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할 책임이 있었음에도 이를 외면했다. ... 한 총리를 파면해 임명권자인 대통령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부여받은 국민의 신임을 박탈함으로써 얻는 헌법수호의 이익이 파면에 따르는 국가적 손실을 압도할 정도로 크다. 그렇다면, 이 사건 심판청구는 이유 있으므로, 피청구인을 파면하여야 한다."

- 정계선 헌법재판관 

6.

"시간이 지체되면, 되어야 할 것을 되게 하지 않으면, 밀실 중의 밀실, 최후의 밀실 우리 내면의 양심이 훼손된다. 양심의 훼손은 인간성의 훼손이다. 양심, 나의 도덕이 훼손되면 갈 곳이 없어진다. 그러면 전부 아니면 '無', 이 상태의 투쟁이 강요된다.

전체 아니면 무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우리 국민을 몰아가지 않으려면.. 헌법 재판관님들께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이번 주 안에 하셔야 합니다."

- 철학자 박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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