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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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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하다. 가지 말까?' 지리산에 가는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한 번쯤은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생각이 뭐라고 떠들든 몸은 꾸역꾸역 지리산으로 향한다. 지리산을 몇 번 올랐는지, 몇 번 종주했는지 세는 것은 예전에 그만두었다. 자기 고향에 몇 번 들렀는지를 세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버스에 앉아 창밖을 구경하다 보니 지리산 산세가 보이기 시작한다. 버스가 지리산으로 들어설 때의 느낌을 나는 무척 사랑한다. 그리고 버스에서 내려 지리산의 신선한 공기를 맡는 순간 '가지 말까?' 했던 생각과 짝을 이르는 생각이 역시 어김없이 든다. '지리산은 지리산이다. 오길 잘했다.'

천왕봉에 오르니 물안개가 자욱하다. 연이틀 호우가 내렸기 때문이다. 정상에 묵묵히 앉아 안개가 오가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상쾌하고, 평화롭다 ―. 그러다 갑자기 물안개가 걷히며 누군가 붓으로 손수 그린듯한 구름바다가 펼쳐지고 신선한 파란 하늘이 펄떡거린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나는 이 천국 같은 광경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지리산을 오르다 보면 곳곳에 경고 표지가 있다. 심장마비로 사망한 사람이 많이 나온 구간이니 조심해 산을 오르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저 구름바다 위 파란 하늘 너머 반짝이는 저곳이 저승으로 가는 '천왕봉 코스'라면, 지리산을 오르다 심장 마비로 그 코스를 밟는 것이 꼭 경고받을 일은 아니리라. 덤으로 지리산 산신령이 저승 가는 길을 배웅해줄지 또 누가 아는가. 물론 망상이다. 죽고 사는 일, 언제 나고 언제 죽는가, 어디서 나고 어디서 죽는가, 그건 아마도 우리의 소관이 아닐 것이다.

하산길, 빗물에 불어난 계곡물이 폭포수 같은 소리를 내며 경쾌하게 흐른다. 귀가 먹먹하다. 이 박진감 넘치게 돌진하는 시원한 소리가 마음의 소음을 휘몰아 쫒아내 버린다. 투명한 계곡물에 풍덩 마음을 담근 것 같다. 가을이다. 집으로 돌아가 말끔해진 마음으로 가을을 맞고 싶다. 

오늘의 베스트 장면:
- 커플 등산복을 입고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꼭 붙어서 한여름에 봄바람을 일으키며 산을 오르던 어느 젊은 커플. 내게 무척 다정하게 인사해주었기에 가산점 5점.

아깝게 떨어진 후보
- 산행길에 계속 출몰하여 즐겁게 해주었던 다람쥐. 손 붙잡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요즘 밥은 먹고 다니느냐고 물어도 보고. '휴.. 요즘 우리도 힘들어..' 하며 다람쥐가 담배 하나 꺼내 물것만 같았다. 
- 천왕봉 구름바다. 굉장했다. 그러나 경치구경보다 사람구경이 더 재미있고, 경치보다 사람이 더 아름다울 때가 있는 법이다.
-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고 다람쥐 같은 체구로 비 때문에 미끄러운 산길을 마치 축지법을 쓰듯이 내려가던 어느 아가씨. 베스트 장면으로 꼽을 뻔했으나, 그러다가 무릎 나간 안모형이 떠올라 그만두었다. 안모형의 탈모도 어쩌면 다 그때 나간 무릎 때문일지 모른다(웃음). 

12/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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