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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하면 자유로워지고 올바른 정신이 몸에 찾아든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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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하면 자유로워지고 올바른 정신이 몸에 찾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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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는 의지에 따른 결의로부터 우리를 은밀히 벗어나게 만드는 이런 스트레스 해소의 이완(의미 부여와 행위 그리고 의무들로부터의 이완)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은 항상 스토아 학파의 주제와 같은 어떤 것에서부터 시작하게 된다. 사실 죽음과 삶, 존속 또는 사라짐, 불행 또는 영광, 가난 또는 부유함 등의 영고성쇠는 "개인적 조화를 어지럽히고, 가장 깊숙한 내면으로 침투할 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 배경에서는 스토아 학파와의 차이가 다시 한 번 은밀하게 나타나고 있다. "지혜"란  우리가 이러한 영고성쇠를 뛰어넘어 "극복하고" 조화로운 삶을 "지속시키도록" 노력함(세상 그리고 자기 자신과 "소통"하는 가운데, 통(通)의 이중적 의미) 속에 있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면, 우리는 결코 이러한 영고성쇠의 방해를 받지 않게 된다(따라서 우리는 "즐거움'으로부터도 유리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더 도가의 현자는 공자의 제자의 입을 빌려 말하길, 


"만약에 우리가 낮과 밤 동안에 터럭 끝만큼의 중단도 없이 세상과의 관계 맺음 속에서 봄철과 같이 신선한 상태에 머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역동성을 깨어버리는 중단이 없음은, 중국의 무술에서와 같이, 우리가 한 동작에서 다음 동작으로 넘어감의 덕 그 자체에 열려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봄철"을 끌어들임은 봄에 집착하는 것(그렇게 집착하면, 봄이 지나감을 애석해하게 된다)이 아니라, 생명력에 끊임없이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도약력에 동참할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활력의 유지는 엄밀히 말해 전개에 따르는 것이지, 스토아주의에서처럼 결의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주석가들이 피상적으로 이해했던 것처럼, 단순히 세상과 자신의 관계를 조화롭고, 자신에게 이롭게 되도록 이끌어가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계절이 전개되는 것과 같이, 이 세상과 함께하며 삶을 전개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연속되는 영고성쇠(이러한 변화의 항상성 덕분에)를 뛰어넘어, 우리의 생명력을 봄철이 몰고 오는 참신한 기운에 맞추어 지속적으로 유지시킬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생명력을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이완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자유방임이나 의지적 경직성과는 날카로운 대립을 이룬다. 그것은 우리가 불필요한 자극과 흥분을 뛰어넘어, 이 세계를 끊임없이 새롭게 거듭나게 만드는 저 고무적 큰 흐름에 열려 있도록 해준다. 


물론 이러한 이완은 신체적 조절과 유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행동거지에 수정을 가할 것을 권장한다. 아니면 오히려 그것은 그러한 수정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양생의 가르침은 철학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장자』에서 설결은 피의에게 가 무엇인지에 대해 물을 때, 피의는  곧장 다음과 같이 응답한다.


그대가 그대 모습을 단정히 하고

그대의 눈길을 한곳에 집중한다면

자연의 화기가 바야흐로 모여들게 될 것이네

그대의 [이것저것 분별하는] 생각을 없애고

그대의 태도를 바르게 하면

[올바른] 정신이 몸에 찾아들게 될 것이네.」*


16/03/18


* 프랑수아 줄리앙. (2014). 장자, 삶의 도를 묻다. (박희영, Trans.). 파주: 한울. 문단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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