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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 파괴적 유토피아주의 본문

명문장, 명구절

우상 파괴적 유토피아주의

모험러

「야코비(Russell Jacoby)는 현대의 유토피아 사상에서 보이는 두 가지 전통을 구분하는데, 이 둘은 종종 일치하지만 반드시 상호 연관되지는 않습니다. '청사진적 전통'("청사진적 유토피아주의자들은 미래를 몇 분의 몇 인치까지, 몇 분의 몇 분까지 꼼꼼하게 입안했다")과 '우상 파괴적 전통'(우상 파괴적 유토피아주의자들은 "더 나은 사회를 꿈꾸었지만" "그것을 정확히 가늠하는" 것은 거부했다)이 그것입니다. 저는 야코비가 말한 두 번째 전통, 즉 '비-청사진적인' 유토피아 전통을 위해 제안하는 이름을 고수할 것을, 하지만 그것의 의미를 약간 수정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 개념의 모호성 또는 의도적 부정확성 외의 속성들에 초점을 맞출 것을 말이죠.


제가 제안하려는 의미는 '우상 타파주의'라는 생각 자체 속에서 암시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파괴하고, 탈신비화하고, 궁극적으로는 지배적인 삶의 가치와 시간 전략들의 정체를 폭로하려는 의도를 가리킵니다. '우상 파괴적' 유토피아란 지배적인 가치와 전략들의 추구가 더 나은 사회나 더 나은 삶의 등장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회와 삶으로 나가는 길에서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 될 뿐임을 폭로하는 유토피아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저는 '우상 파괴적 유토피아'라는 개념을 (모든 유토피아에서 그렇듯이) 현재의 삶의 방식과 의미들을 비판적으로 수정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해독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억압되었고 은폐되었을,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을 '다른 곳', 또 다른 '사회 현실'의 가능성을 드러내기 위한 주요한 요소로 말이죠. 바로 그것이 '우상 파괴적 유토피아'의 주요 관심사이자 이 이념이 사로잡고 있는 생각이기 때문에 현재에 대한 대안이 스케치에 불과한 것으로 남아있다고 해서 놀랄 일은 없습니다.


예언적 비전이 모호한 것은 단지 주관심사가 그렇기 때문에 나오는 당연한 부차적 결과일 뿐입니다. 우상 파괴적 유토피아 사상은 기본적으로 대안적 사회 현실에 대한 정확한 설계가 아니라 가능성을 겨냥합니다. 노골적으로든 아니면 암묵적으로든 '더 나은 사회'로 향하는 길은 유토피아를 그리는 사람들, 즉 유토피아의 선견대나 병참 장교들의 화판을 거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재 벌어지는 인간적 실천과 신념에 대한 비판적 성찰들을 통해, 그리하여 (블로흐의 생각을 빌리자면) '무엇인가가 결여되었음"을 폭로하고, 창조나 회복을 위한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통해 앞으로 나가는 것이지요.


모리스 시대에 유토피아들은 경향적으로 청사진 쪽에 서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 대신 우상 파괴적 유토피아들 시대가 도래했다고 믿습니다(비록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지에 대해서는 내기를 걸고 싶지 않지만 말입니다). 유동적 현대, 즉 강박증적인/강제적인 DIP(즉 규제 완화, 개인화, 사사화)와 소비주의와의 일괄 타결 속에서 말입니다. 그러한 유토피아가 더 잘 정착할수록 그것의 보호 속에 있는 삶의 궁극적인/예견되는/내재적인 목적지는 그만큼 더 분명해집니다. 두 종류의 유토피아 모두 자체에 고유한 디스토피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모든 후손이 그렇듯이 유전적으로 그렇게 규정되어 있지요. 그러한 디스토피아들이 생활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배아들은 내적인 악마들로 변합니다. ······」*


15/08/20


* 지그문트 바우만, & 시트랄리 로비로사-마드라조. (2014). 빌려온 시간을 살아가기: 몸도 마음도 저당 잡히는 시대. (조형준, Trans.). 새물결.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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