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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종말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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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미명의 시대다. 그 어슴푸레함이 일몰 후의 것인지, 일출 전의 것인지 아직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이 미명은 특이하다. 이어질 미래의 비결정성-불확실성을 특징으로 하는 낮은 어두움, 혹은 흐릿한 빛, 이를 우리는 미명이라 부르기로 한다.

이 미명은 특이했던 한 시대의 종언, 즉 '종언의 시대'의 종언에서 비롯한다. '역사의 종언', '의미의 종언' 또는 '정치의 종언', 심지어 '문학의 종언'까지. 역사가 끝난 종언의 시대는 영원할 듯하였다. '무정한 이기주의', '워싱턴 컨센서스' 그리고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등은 종언의 시대를 상징하는 키워드들이었다. 

'종언의 시대' 담론은 삶의 지평, 역사의 지평에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 미지를 지운다. 모든 것이 알려져 있고, 아무것도 새로울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알려져 있다 함은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 함이다. 여기에 창조로서 미래는 없다. 이미 결정되어 있는 미래를 촘촘히 채우기만 하면 된다. 이 담론의 진정한 문제는 삶과 역사를 진부하게 만든다는 데 있지 않다. 부패하고 폭력적으로 만드는 것이 문제다. 미지가 지워진 알려진 것들만의 세계는 침강하여 힘의 질서에 따라 퇴적한다. 질량과 힘이 질서의 중심에 선다. 물의 질서, 동물의 질서. 독자는 이렇게 물으리라. '인류 역사가 언제는 그러지 않았던가?' 그러나 역사의 종언 담론의 특징은 이러한 문제적 질서에 대한 의문, 문제제기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 이데올로그들은 이를 오히려 어떤 군더더기나 허위도 없이 완벽한 자연법적 질서라 칭송한다. '역사의 종언'의 시대정신을 선명히 표징하던 신자유주의와 유전자 결정론이 '피로 범벅이 된 이빨과 발톱'의 자연 이미지에 사뭇 경건한 활홈감을 느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 책은 그러한 종언의 시대가 이제 종언을 고해 가고 있음을 때로는 은미하게 때로는 선명하게 느껴간 순간들의 기록이다. 흐릿함 속에서 호젓이 글을 써 가다 주제의 흐름 안쪽으로, 전혀 예상치 못한 숨겨진 미지의 영토를 발견하였을 때의 희열과 흥분이 이 책 구석구석에 조금은 자취를 남기고 있을 것이다. 그런 조그만 희열들 속에서 난 '종언의 시대의 종언'을 조금씩 예감할 수 있었다. 이제 그것은 명확해 보인다.」*

14/07/26

* 김상준, <미지의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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