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러의 책방
깨달음엔 끝이 없다 본문
비이원의 수행은 조건지어진 목표가 없다. 조건지어진 목표가 없으므로 더 높이 비상하려는 모든 목표를 포용한다. 모든 목표를 포용하므로 달리기, 웨이트 트레이닝, 스포츠, 악기연주, 춤, 학습, 사색, 봉사, 선행부터 묵상, 요가, 방중술, 단전호흡, 참선, 명상에 이르기까지 그에 이르는 모든 수행도 포용한다. 모든 수행을 포용하지만 그 자신은 수행이 없다. 모든 목표를 포용하지만 그 자신은 목표가 없다. 모든 도전과 좌절, 그에 따르는 모든 희노애락을 포용하지만 그 자신은 희노애락이 없다. 그래서 비이원은 어떠한 수단으로도 도달할 수 없지만, 또한 어떠한 수단으로도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찾을 것도 없고, 해야할 것도 없다는 말의 참된 뜻이다. 이것이 비이원 전통, 그리고 선(禪)의 위대함이다.
「윌버: ... [비이원 전통에서] 당신은, "자, 나는 완전하게 깨달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경지인 종착점에는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전통들에서는 '깨달음'이란 생겨나고 있는 새로운 '형상'들의 계속 진행 중에 있는 과정 자체이고, 그래서 당신은 '공'에서 나온 '색'으로서 그들과 연관됩니다. 당신은 이러한 모든 '형상들'이 생겨날 적에 그들과 하나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의미에서 당신은 깨달았습니다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새로운 형상이 언제나 계속 생겨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깨달음은 진행 중에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결코 더 이상의 발달을 하지 않는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색계'에 대해 늘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고, 따라서 당신의 전반적인 상태는 언제나 저절로 진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어떤 굉장한 도약적 깨달음의 체험들을 ― 예컨대, 견성을 ― 성취할 수는 있지만, '형상'의 새로운 파도는 끊임없이 생겨나게 되므로 이러한 체험들은 단지 그 파도를 타는 끝이 없는 과정의 시작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즉 비이원적 의미에서, '완전히' 깨달았다는 말은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질문: 이러한 '비이원적' 전통 중의 일부는, 특히 탄트라 불교는 꽤 황당하게 나오는 것 같습니다만···.
윌버: 그렇습니다. 그들 중의 일부는 꽤 황당하게 나오지요. ...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러한 모든 것들[타락된 삶의 상태조차 버리지 않고 그것과 더불어 놀며 즐기는 것]은 어떤 매우 강력한 윤리적 기틀 내에서 일어나게 되고, 그래서 당신이 함부로 '달마놀이'(Dharma Bums)나 하면서 그러한 것을 비이원적인 것이라고 일컫는 것은 결코 허용되지 않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전통들에 의하면 초개인적 발달의 처음 세 단계(심령적·정묘적·인과적 단계)를 통달하기 전에는 당신은 제4의 의식상태 또는 '비이원' 의식상태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습니다. '광인의 지혜'(Crazy Wisdom)는 매우 엄격한 윤리적인 분위기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비이원적' 전통에서 당신은 당신 수련의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매우 신성한 서원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서원이란 다름 아닌, '나는 적멸(寂滅) 속으로 사라지지 않겠다'는 거지요. 말하자면 당신은 열반 속으로 숨어 버리지 않겠다는 것이고, 멸진정(nirodha) 속에서 증발해 버리지 않겠다는 것이고, 니르비칼파(nirvikalpa) 속으로 자신을 감춤으로써 세계를 방치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당신은 저 윤회의 파도에 사로잡힌 모든 존재들이 그 파도가 곧 '공'의 현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때까지 자신도 파도타기를 할 것을 서약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서원은 가능한 한 신속하게 적멸을 관통해 '비이원성'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리하여 당신은 모든 중생들이 그들 출생의 실존 바로 한가운데에 있는 '불생'을 알아차리도록 도와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이원적 전통들에서는 우리의 감정이나 상념이나 욕망이나 성벽들을 꼭 버려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과업은 단순히 모든 '형상' 중의 '공'을 보는 것이지, 모든 '형상'을 현실적으로 제거해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형상'은 계속하여 생겨나고 당신은 파도타기를 배웁니다. '깨달음'은 정말로 원초적이지만 이러한 '깨달음'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고, 그리고 새로운 '형상'이 영원히 생겨나게 마련이므로 그 깨달음은 또 그 '형상'을 영원히 변화시키고, 그래서 당신은 그들과 하나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이원적 전통에서 요구하는 바는, '공'으로 상주하라, 모든 '형상'을 포용하라는 것입니다. 해방(해탈)은 '공' 속에 있지 결코 '색' 속에 있지는 않지만, '공'은 그 모든 대상들의 거울로서 모든 색을 포섭합니다. 그리하여 '형상'은 계속하여 생겨나고, 한 손으로 치는 손뼉소리로서의 당신은 곧 모든 그러한 '형상'들입니다. 당신이 바로 현시이고, 당신과 우주는 곧 '일미'입니다. 당신의 '본래면목'은 순수한 '공'이고, 그래서 당신이 그 '공'의 거울 속을 들여다볼 때마다 당신은 오직 전체 '온우주'만을 보게 됩니다.」*
13/11/15
* 켄 윌버, <모든 것의 역사>에서 발췌, 수정.
'명문장, 명구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어떤 수행자들은 멍청이로 보이나? (1) | 2013.11.17 |
---|---|
극단적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0) | 2013.11.17 |
유아독전적 환상 (0) | 2013.11.16 |
허무여 안녕 (0) | 2013.11.14 |
생명의 위계 (0) | 2013.11.13 |
상승과 하강의 통합 (0) | 2013.11.13 |
영의 다른 명칭 (0) | 2013.11.13 |
모험러의 책방
서평, 리뷰, 책 발췌, 낭독, 잡문 등을 남기는 온라인 책방. 유튜브 채널 '모험러의 책방'과 ′모험러의 어드벤처′(게임) 운영 중.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