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러의 책방
백발가 본문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더라. 나도 어제 청춘이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줄 아는 봄을 반겨한들 쓸데있나.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네가 가도 여름이 되면 녹음방초 승할시라, 옛부터 일러 있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돌아오면 한로삭풍 요란해도 제 절개를 굽히지 않는 황국단풍은 어떠한가. 가을이 가고 겨울이 돌아오면 낙목한천 찬바람에 백설만 펄펄 휘날리어 은세계가 되고 보면 월백설백 천지백 허니 모두가 백발이 벗이러구나.
무정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이 내 청춘도 아차 한번 늙어지면 다시 청춘은 어려워라. 어화, 세상 벗님에들 이내 한 말 들어보소. 인간이 모두가 팔십을 산다고 해도 병든 날과 잠든 날, 걱정근심 다 제하면 단 사십도 못사는 인생 아차 한번 죽어지면 북망산천의 흙이로구나.
사후에 만반진수는 불효, 생전에 일배주만도 못하느니라. 세월아 세월아 세월아, 가지 말아라. 아까운 청춘들이 다 늙는다. 세월아 가지 마라. 가는 세월 어쩔거나. 늙어진 계수나무 그 끄트머리에다 대란 매달아놓고, 무법도식하는 놈과 부모 불효하는 놈과 형제화목 못하는 놈 차례로 잡아다가 저세상으로 먼저 보내버리고 나머지 벗님네들 서로 모여앉아 한잔 더 묵소, 덜 묵게 하면서 거드렁거리고 놀아보세.」*
13/03/04
* 장일순, <나락 한알 속의 우주>에서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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