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러의 책방
집착과 체념은 받아들임이 아니며, 체념하는 받아들임은 생명력을 죽인다 본문
가슴이 시키는 일에 과감히 뛰어들고, 불확실한 사랑에 도전하며, 그 실수와 실패와 거절과 쪽팔림과 상처 (그리고 아주 가끔의 성공)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 이러한 차원의 '받아들임'은 오랜 연습과 수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머릿속으로 세상과 나를 '받아들이겠다'고 어느날 결심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러한 종류의 발작적인 결심은 대게 체념으로 끝나며, 체념은 생명력과 행동력을 죽인다. 나는 아직 걸음마도 못 뗀 것 같다.
「사람들이 진실한 받아들임을 아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그 부분적인 이유는 '받아들임'이라는 말이 보통 '거부'의 반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뭔가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음이 틀림없다. 거부는 *밖으로* 밀치는 것이다. 받아들임은 체념적이든, 집착하는 방식이든 뭔가를 *안으로* 들여놓는 것이다. 만일 내가 뭔가를 밖으로 던져버리지 않는다면, 그 대신에 나는 그것을 먹어치워 버린다. 나는 밀어내거나 들여놓으며, 거부하거나 받아들인다. 이 둘은 보통 우리가 *경험*과 관련을 맺는 두 가지 방식이다.
*참본성*의 받아들임은 이와는 상당히 다르다. 진실한 받아들임은 어떤 것도 붙잡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진실한 받아들임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로 존재*하는 게 행복해. 지금 좋은 음식을 먹든 나쁜 음식을 먹든 중요하지 않아. 다 괜찮아. 나는 모든 경험과 *함께* 여기에 있을 수 있어. 흥미로운 일이야. 맛이 끔찍할 수도 있고 좋을 수도 있지만, 나는 거기에 완전히 열려 있어." 이 경우에는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그것을 판단할 필요가 없다.
비교하는 도덕적 판단 없이 진실로 경험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거기에 대해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거기에 대해 기쁘지도 않은 것이다. 만족하지도 불만족하지도 않는다. 나는 거기에 대해 특별한게 뭔가를 느낄 필요가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그것이 괜찮다.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 대부분 좋은 느낌의 뭔가에 *집착*하려고 하거나, 좋지 않은 느낌의 뭔가에 대해 다른 방법을 몰라서 어쩔 수 없이 *체념*한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사람들이 물질 세상에 있는 어떤 것과 투쟁할 때 종종 일어난다. "나는 마침내 내 몸무게를 받아들이기로 했어." 이 경우에 받아들임이란 무슨 의미인가?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이런 뜻이다. '나는 살을 빼려고 애쓰고 또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어. 차라리 그대로 유지하는 게 낫겠어. 할 수만 있다면 살을 뺐겠지.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못하겠어.' 그것은 진실한 받아들임이 아니라 체념이다.
진실한 받아들임은 내 몸무게가 달라져야 한다는 *판단*이 아니다. 진실한 받아들임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니까 나는 그것을 경험하고 온전히 함께 있는 것에 흥미가 있어. 나는 전적으로 현존하며, 에너지와 흥미, 삶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여기에 존재하고 있어." 체념하는 받아들임은 열정이 줄어들게 한다. 그것은 참본성의 태도가 아니라, 실제로는 살아 있음이 없는 거부, 즉 힘 빠진 거부인 에고의 태도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집착하는 받아들임 또한 진실한 받아들임이 아니다.
우리가 진실한 받아들임이라고 부르는 것은 만족하는 자각(contented awareness)에 가깝다. 그것은 자신에게 만족하는 자각이다. 그 자각은 자기 안에 일어나는 일을 판단하고 거부하느라 바쁘지 않다. 진실한 받아들임은 어딘가에 관여하지 않으며, 사물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달라져야 한다는 어떠한 욕망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수행을 해나감에 따라 우리는 이러한 경험에 대한 반응, 즉 거부, 체념적 받아들임, 집착하는 받아들임을 알아차리고 이해하는 데에 더욱 능숙해진다. 그에 따라 우리는 점점 더 있는 그대로의 경험과 함께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수행을 '자각과 함께 현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각과 함께하는 현존(presence with awareness)은 거부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다. 경험 속에서 단순히 현존하고 자각할 때, 우리는 일어나고 있는 진실한 상태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경험과 함께하면서 우리는 내적인 태도가 점점 더 단순해지고, 더 미묘해지는 것을 알아차린다. 우리는 열려 있음, 상처받기 쉬운 상태, 그리고 미묘한 만족감이 있는 허용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현존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경험이 바로 *참본성*의 표현임을 드러내준다. 의식의 이러한 특질은 우리가 좋아하는 어떤 특별한 일이 벌어지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진실한 받아들임은 거부하거나 집착하는 경향성인 반응들에 영향받지 않으면서 반응들과 함께 현존하는 결과로서 저절로 일어난다.」*
16/01/15
* 알마스. (2015). 늘 펼쳐지는 지금. (박인수, Trans.). 파주: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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