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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의 거짓말 본문
「이로써 오뒷세우스는 회사를 위해 자기 생애를 걸면서 직원들에게도 그에 상당하는 희생정신을 요구하는 기업가의 모습을 예고한다. 목표는 생산을 끌어올리는 것, 몇 사람의 삶이 망가진다 해도 그 따위는 부차적인 일, 아니 기업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이렇게 괴물들의 조건에 따른 대가로 보장받은 오뒷세우스의 목숨은 그의 상징적 죽음을 표명한다. 원시적 힘들과 계약을 맺는 술책은 계몽된 이성의 타락을 의미한다. 계몽된 이성이 도입한 정의는 옛 탈리온 법과 형식적으로만 다를 뿐, 결국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의는 실질적인 변화가 전혀 없으며 지배와 폭력에 맞서는 모든 이에게 어떤 진보도 의미하지 못한다. 기업가는 언제나 무사히 길을 건너고 만다. 오직 그만이 만남의 조건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괴물의 잔혹한 결단 앞에서 일단 포기할 것은 포기할 줄 알고 상대의 규칙을 기술적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그의 삶, 역할, 나아가 그가 받는 보수는 정당한 것이 된다. 또한 그러한 체념과 지식에서 전우들/직원들에게 자신이 그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거짓말을 할 수 있는 힘이 나온다. 하지만 그 우위는 원시 신앙과 구조에 사실상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양상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기업가는 자신의 자질과 자기 앎의 가치에 대해서 거짓말을 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그 앎을 저 유명한 “해 아래 새것이 없도다”라는 냉소적이고 메마른 지혜에 비교한다. 기업가가 자기 아랫사람들에게 명하는 노동의 산물은 지적ㆍ물질적 진보를 약속하지만 그가 끌어들이는 노동의 조건 그 자체 때문에 진보가 무효화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노동자들을 병들게 하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그 조건에서 인지 능력은 질식되어 버린다. 실제로 오뒷세우스는 전우들에게 그들을 기다리는 무서운 재앙의 위력을 결코 말해 주지 않을 것이다. 노동의 조건은 그들을 잃게 할 뿐만 아니라 기업의 번영이라는 명목하에 그들의 개인적 삶을 파기할 것을 전제한다.
… 자본주의의 태동기에는 기업가가 사회에 반하여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와 행동 이유를 구현하는 자유롭고 강인한 개인을 나타냈다. 그러나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가는 자신이 너무나 잘 아는 현실을 절대적으로 존중하고 무한 반복하는 — 그러기를 원하지도 않고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 역할로 전락했다. 결국 오뒷세우스의 모든 지식, 전쟁과 항해에서 얻은 경험은 다시 제우스의 뜻, 소위 운명을 얌전히 따르는 데에만 도움이 되었을 뿐이다.
“자, 이제 모두 내가 말하는 대로 합시다! 그대들은 노 젓는 자리에 앉아 바다의 무섭게 부서지는 너울을 노로 치도록 하시오. 그러면 제우스께서 아마도 우리가 이 파멸을 피하고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이오”[『오뒷세이아』 중].」*
15/12/29
* 클로디 아멜, & 프레데릭 코셰. (2014).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오뒷세이아. (이세진, Trans.). 파주: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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