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러의 책방

기(氣)만이 발하고 이(理)는 거기에 탈 뿐이다 본문

명문장, 명구절

기(氣)만이 발하고 이(理)는 거기에 탈 뿐이다

모험러
헤겔 등은 동양철학을 속된 말로 개무시하지만, 조선의 천재 율곡 이이는 화이트헤드가 주장하는 이른바 '과정 철학', '유기체 철학'의 아이디어를 1500년대에 이미 선취하고 있었다. 불가나 도가는 뭐 말할 것도 없고.

「신유학의 이(理) 개념은 과정 철학의 '영원 대상'(eternal object)에, 기(氣) 개념은 '사실 존재'(actual entity)에 비교될 수 있다. 주자와 퇴계는 이(理)에 작위성이 있다고 본데 대하여, 율곡은 없다고 보았다. 퇴계의 이기호발론과 율곡의 기발이승론은 이런 점에서 서로 대립된다고 할 수 있다. 퇴계는 이(理)와 기(氣)에 효능인이 있다고 본 데 대하여 율곡은 그것이 기(氣)에만 있지 이(理)에는 없다고 본다. 플라톤의 경우는 이데아만이 작위성과 효능인이 있지 사물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이 오직 이데아에 우연적으로 의존되어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주자는 플라톤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자와 퇴계 그리고 플라톤은 모두 존재 원리를 어기고 있다.

화이트헤드와 율곡은 철저하게 존재 원리에 따라 사실 존재와 기(氣)에만 작용과 행위가 가능하다고 본다. 이(理)든 태극이든 영원 대상이든 그 어떤 것도 사실 존재와 기(氣)의 상위 개념으로 작용을 가능하게 만들거나 효능인으로서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러면 이(理)나 영원 대상이 왜 필요한가?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대답한다. 작용은 작용이기 위해 한정적인 형상(즉 영원 대상)과 명확한 성격과 특징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의 한정적인 작용이기 위해서 형상을 지녀야 하고, 이러한 한정성의 형상 없이는 어떤 개별적인 작용도 없으며, 따라서 어떤 사실 존재도 존재할 수 없다. 이리하여 한정성의 형상은 사실 존재의 기본적이고 필연적인 성분이다. 여기서 '형상'이라는 말이 '영원 대상' 혹은 율곡의 이(理)에 해당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理) 혹은 영원 대상은 존재하는 것이기는 하나 스스로가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실 존재를 한정시키고 국한시킨다는 한정성의 형상으로만 존재한다. 생성, 변화, 전이를 겪어 나가는 것은 사실 존재이지 영원 대상은 아니다. 영원 대상은 이와 같은 생성 변화를 겪지 않는다. 사실 존재가 생성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결정 인자로 머문다. 율곡이 이(理)를 풀이한 소이(所以)와 결정 인자는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영원 대상은 생성 과정에 있는 사실적 존재자들을 한정하고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존재하게 된다.

율곡은 현상 세계에 궁극성이 있음을 철학의 원칙으로 삼고 있다. 현실적인 것을 떠나서는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율곡에 있어서 이(理)의 분화는 기(氣)를 타고 현상화하는 것이요 이(理)의 독자적인 분화는 아니다. 기(氣)가 현상화하여 나타나는 데에 이(理)가 없는 데가 없다. 그렇다고 율곡은 이(理)가 기(氣)에 앞서 오지 않는다고 해서 기(氣)가 이(理)를 앞선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기(氣)가 발하는 데 이(理)가 탄다는 것은 기(氣)가 이(理)보다 앞선다는 것이 아니다.

기(氣)가 발하고 이(理)가 탄다는 것은 어느 것의 선후를 말하자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만물의 운동 변화가 그 스스로의 내재 원인에 의한 기(氣)의 작용이지 어떤 다른 통제자, 주재자의 작용에 의하여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말하는 데 그 근본 의도가 있다.

기(氣)가 발하는 데 이(理)가 타는 일도만을 말하는 것은 근본을 추구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율곡이 말하는 '근본'이란 화이트헤드의 궁극성이란 개념과 일치한다고 보아도 좋다. 즉 주자와 퇴계가 우주의 궁극적인 것을 태극이나 이(理)로 보았다면, 율곡과 화이트헤드는 '작용' 혹은 '행위'를 궁극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작용이나 행위를 궁극적인 것으로 보았을 때에, 기(氣)에 표준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율곡의 생각이다. 플라톤은 작용에 초점을 두지 않고 존재에다 두었기 때문에 존재의 존재 혹은 존재 자체 같은 상위 개념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자도 마찬가지이며 이들은 모두 잘못 놓은 구체화의 오류를 범했다.」*

14/11/25

* 김상일, <화이트헤드와 동양철학>에서 발췌, 재구성.

모험러의 책방

서평, 리뷰, 책 발췌, 낭독, 잡문 등을 남기는 온라인 책방. 유튜브 채널 '모험러의 책방'과 ′모험러의 어드벤처′(게임) 운영 중.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