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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 지능은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질서보다 더 깊고 내밀한 곳에 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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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 지능은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질서보다 더 깊고 내밀한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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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행동이 모두 기계처럼 어떤 조건을 따른다고 해보자. 보통 이 생각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이 유전자 구성의 산물이라는 견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환경 요인에 따라 결정된다는 견해다. 유전자 결정론을 믿는 이라면 나는 그러한 믿음이 그저 유전자의 산물은 아닌지 묻고 싶다. 다시 말해 유전자 구조 때문에 그런 말을 하게 되는가? 마찬가지로 누군가 환경 결정론을 말한다면 나는 그 말이 어떤 환경 조건 아래 내뿜는 단어는 아닌지 물을 수 있다. 분명 두 경우 모두 (유전자 더하기 환경이 인간을 결정하는 경우에도) 아니라고 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답변자 자신이 의미 있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슨 말을 해도 화자는 슬기로운 지각을 빌어 말하고 있으며, 이때 그러한 지각은 진리가 될 수 있다. 곧 진리는 단순히 과거에 습득된 의미나 기술이 되풀이된 결과가 아니다. 누구나가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자유롭고 조건 없는 슬기(intelligence: 지각 능력)를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현재 사고를 물질 과정으로 볼 수 있는 증거는 매우 많다. 예를 들어 여러 분야의 관찰 결과, 사고는 뇌와 신경계에서 일어나는 전기·화학 과정 그리고 이에 따라 근육을 긴장시키는 운동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면 슬기도 미세하긴 하지만 비슷한 물질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다. 슬기가 조건 없는 지각 행위가 되려면 세포, 분자, 원자, 기본 입자와 같은 구조에 바탕을 두어서는 안 된다. 결국 그러한 구조에 대한 법칙을 따르는 어떤 대상도 알 수 있는 영역, 곧 기억에 저장되는 영역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러한 대상 또한 기계처럼 작동해야 처음부터 기계처럼 작동하는 사고 과정에 흡수된다. 반면 실제 슬기 작용은 우리가 아는 법칙으로 결정하거나 조절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따라서 슬기는 확정되지 않는 흐름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이것이 모든 확정된 물질 형태의 바탕이기도 하다. 따라서 슬기는 특정 분야(물리학이나 생물학)에 기초해 설명할 수 없다. 그 기원은 우리가 아는 어떤 서술 질서보다 더 깊고 내밀한 곳에 있다(하지만 확정된 물질 형태의 질서를 먼저 알아야 슬기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슬기와 사고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간단히 말해 사고만이 홀로 작동할 때는 슬기롭다기보다 기계와 같다. 보통 관련 없고 맞지도 않는 질서를 기억에서 끄집어내 들이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고도 (기억만이 아닌) 슬기라는 조건 없는 지각에 반응할 수 있고 이때 어떤 생각이 관련 있고 어떤 생각이 올바른지 알 수 있다.

이를 라디오 수신기에 비교해 볼 수 있다. 수신기의 출력이 입력에 피드백될 때 수신기는 홀로 작동하며, 보통 관련 없고 무의미한 잡음만을 낸다. 하지만 수신기가 전파 신호를 받으면, 그 안에서 전류는 질서 있게 흐르고 (음파로 변형) 이는 신호 안의 질서와 일치한다. 곧 수신기는 자기 수준 너머에서 시작된 의미 있는 질서를 찾아 이를 자기 수준 운동으로 가져온다. 그렇다면 뇌나 신경계도 슬기로운 지각에서는 흐름 속 질서에 곧바로 반응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미지의 흐름은 우리가 아는 어떤 구조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따라서 슬기나 물질 과정 모두 그 기원은 하나이며, 이는 결국 알려지지 않은 흐름 전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흔히 정신이나 물질이라 부르는 것도 흐름에서 나온 추상물이다. 따라서 이 둘은 전체운동에서 서로 다른 정도로만 독립된 질서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슬기로운 지각에 반응하는 사고를 할 때 정신과 물질 사이에 조화나 일치를 이룰 수 있다.」*

14/09/15

* 데이비드 봄, <전체와 접힌 질서: 물리학계 이단아 봄의 양자물리학 해석>에서 인용,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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