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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러의 책방
가슴이 시키는 일에 과감히 뛰어들고, 불확실한 사랑에 도전하며, 그 실수와 실패와 거절과 쪽팔림과 상처 (그리고 아주 가끔의 성공)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 이러한 차원의 '받아들임'은 오랜 연습과 수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머릿속으로 세상과 나를 '받아들이겠다'고 어느날 결심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러한 종류의 발작적인 결심은 대게 체념으로 끝나며, 체념은 생명력과 행동력을 죽인다. 나는 아직 걸음마도 못 뗀 것 같다. 「사람들이 진실한 받아들임을 아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 그 부분적인 이유는 '받아들임'이라는 말이 보통 '거부'의 반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뭔가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음이 틀림없다. 거부는 *밖으로* 밀치는 것이다. 받아들임은 체..
마하리쉬나 마하라지 계열 영성·명상 서적에서 다 내려놓고 다 내맡기고 다 허용하라고 할 때 이러한 말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막사는 것이 다 내려놓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하고 싶고 노력하고 싶고 바꾸고 싶고 투쟁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 무언가 하고 싶고 바꾸고 싶은 마음은 왜 쉽게 판단하고 차별하는가? 하필 그런 종류의 마음만 환상이고 마야인가? 그런 마음과 행동도 허용하고 내맡기고 지켜보라. 이런 류의 책에서는 자신을 바꾸려는 노력, 욕망을 성취하려는 노력,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노력이 고통을 낳고 그러한 것을 성취해보았자 거기에는 행복이 없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반대로 아무것도 안 하려는 노력과 그냥 지금처럼 사는 것에 행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은 '기세'가 있으면 가능합니다. 끝내는 것도 간단합니다. 다만 계속해가는 것만이 어렵습니다. 혹시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하루 이틀 시간이 경과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실 자신에게 맞는 게 아닐까요?"* - 마스노 슌묘 13/10/01 * 마스노 슌묘, 에서 봄. 2012/10/24 - 하고 싶은 일 2012/09/12 -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을 끝맺음하는 절의 제목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카뮈의 말을 빌려 우리의 삶을 시지프스의 처지와 비교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시지프스는 원점으로 다시 돌아오는 바위를 쉬지 않고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았다. 우리 삶도 그토록 고된 형벌이란 말인가? 삶은 헛되고 무의미하다는 말인가? 아니다. 카뮈는 시지프스 신화를 통해, 삶의 고통을 회피하지 말고 '자각'하라고 말했다. 그 어떤 운명도 경멸이나 무시, 회피를 통해서는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을 자각할 때, 바위를 굴려 올리고자 몸부림치는 그 투쟁 자체도 우리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한다. 삶이 주는 고난 속에서도 시지프스는, 아니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결국 시지프스는 있는 그대로의 ..
해야만 하는 일들이 매 순간 다가온다. 이 해야만 하는 일을 담담히 묵묵히 맞고 싶다. 어딘가에 존재하는 '하고 싶은 일'이라는 꿈은 하나의 비즈니스 산업이 된 것 같다. 이 사회가 심어주는 '꿈', '하고 싶은 일'이란 기실 그 종류가 매우 한정되어 있지 않은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마음이 떠나 있으면, 그 일이 무엇이든 매 순간 참 힘들다. 그 일을 거부하고 다른 일로 옮겨가고자 한다면 즉각 행동에 옮기던가, 아니면 역시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그릇이 크다'라고 표현하는데, 그릇의 크기는 지위고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위고하에 있든 자신의 일과 삶과 사람을 포용하는 크기를 말하는 것이리라. 아, 이제 다시 일해야겠다. 12/10/24
"자기 계발은 자위행위이자 자기 파괴다." 영화 에서 타일러 더든이 한 말이다. 은 더든이 옳았음을 과학적으로 보여준다. 자기 계발 전도사는 종교에서 불멸을 약속하는 것만큼이나 사기를 치고 있다. 이 약장사는 엄청난 규모의 비즈니스 산업이다. 왜 약이 이토록 잘 팔리는가? 우리가 자신을,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주어진 삶을 완전히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의 불안, 결핍, 공포, 불만족, 연약함, 열등감, 외로움, 모두를 받아들여야 한다. 억울해서 미치고 팔짝 뛸 것 같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패배적이고 운명론적인 태도가 아니다. 완전한 수용 뒤에야 인생은 결국 남과의 레이스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레이스라는 깨달음이 온다. 그때부터 진정 '삶'이라고 부를 만한 삶이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