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러의 책방

무릇 사람들의 근심은 한쪽 모퉁이에 가려져서 천리에 어둡게 되는 것에서 온다 본문

명문장, 명구절

무릇 사람들의 근심은 한쪽 모퉁이에 가려져서 천리에 어둡게 되는 것에서 온다

모험러

「따라서 지혜의 반대 항은 거짓이 아니라 편파적인 것이다. 지혜 속에서 완전한 합치의 중용이 진리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편파성은 철학에서 오류가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을 갖고 있다. 맹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타인의 '담론들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여러 학파들 사이의 토론에서 적대적인 입장들을 드러내는 것은 그들의 이론이 거짓이라고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들에서 결핍된 것을 강조하고 따라서 그 결핍된 것들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기원전 3세기의 순자에게서도 검증할 수 있을 것이다. 순자는 묵가와 동시대를 살았으며 추론의 논리적 엄격성에 매우 예민했으며, 고대 중국에서 논박의 실천을 가장 잘 발전시킨 인물이다. 순자는 마음의 '통치적' 역할에 가치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마음은 "명령들을 내놓는 것이지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마음이 갖는 순수한 인식의 기능에 가치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자율적인 심급을 인정한다. 마음이 마음 자체로 금지하고 혹은 행위하도록 만들고, 황홀하게 하거나 선택하고, 실행하거나 혹은 멈춘다. 그리고 그 심급의 동의하는 능력은 자유로운 것이다. "사람들은 마음이 의견을 바꾸도록 강제할 수 없다." "만일 마음이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면, 마음은 그것을 수용한다. 만일 그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한다면, 마음은 그것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 필연성은 마음이 마음 자체에서 알고 있는 것이다." 유학파에 속했음에도 이 사상가는 사유를 위협한 악을 거짓의 범주에 의해서가 아니라 편파적인 것의 범주에 따라 정의하고 있다. 


실제로 순자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불행은 그들이 특별한 외관에 의해서 맹목적이 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기인하며, 따라서 그들이 통일성의 논리를 모호한 채로 남겨두고 있다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역자주: 무릇 사람들의 근심은 한쪽 모퉁이에 가려져서 천리에 어둡게 되는 것에서 온다.] 하나의 관점에 집중함으로써 인간은 현실의 총체적인 차원을 놓친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이 속았기 때문이 아니라(이러한 관점 역시 사실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이 현실에 의해서 마음이 혼미하게 되도록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사회공동체의 대립과 사유의 무질서가 탄생했다. 


그런데 그러한 편파성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각자가 "개인적으로 자신이 축적했던 것에 집착함으로써", (경험은 그 자체로 효과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후로 더욱 "의존함으로써", "더 이상 타인이 자신에 대해 악하게 말하는 것을 듣는 것 이외에는 어떤 다른 두려움도 갖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더욱 중단 없이 자기 스스로가 옳다고 여기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다른 양상들을 희생시켜서라도 사물의 한 양상에만 더욱 주의를 기울일 뿐이다. 


즉,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만 혹은 자신의 '혐오감'만 볼 뿐이며, 사물의 '시작'만 혹은 사물의 '끝'만 볼 뿐이다. 하나를 봄으로써 사람들은 더 이상 다른 것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나머지 것과 다른 것처럼, 모든 것이 상호적으로 서로를 가린다".


여러 학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진다. 묵가는 '실용적인 것'에 눈이 먼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더 이상 '문화적인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다른 학파(송견, 반전론자)는 욕망의 감소에 눈이 먼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욕망의 만족을 잃게 된다. 또 다른 학파(신도, '법가')는 모든 사람들에 부가된 규범에 눈이 먼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개인적 가치를 잃게 된다. 또 다른 입장(신불해, 법가)은 권력의 지위에 눈이 먼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식견을 갖추는 것의 필요성을 잃게 된다. 또한 다른 학파(혜시, 궤변론자)는 말에 의해 그리고 역설에 대한 취향에 의해 눈이 먼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현실성을 잃게 된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학파(장자, 도가)는 자연적인 것에 눈이 먼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적인 것의 영역을 잃게 된다.


모든 학파들이 옳다. 하지만 그것은 특정한 관점에서 옳다. 그들 중 누구도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단순화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거짓을 참으로 삼지는 않았지만, "일부"를 전체로 삼았다. 매번 그들의 마음은 사물이 갖는 하나의 양상으로 "만족하고 있다". 반면에 "길" 자체는 조절의 "항구성" 속에서 그러한 여러 다양한 양상들 각각의 "끝까지 나아간다". 이 양상들은 "변화"의 가능성들만큼이나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단지 하나의 양상만을 봄으로써 그 사상가들 각자는 진정으로 도를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을" 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도의 충만함을 만드는 편차에 따라서, 그리고 각 사상가는 자신이 집착하는 도의 양상을 "치장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다.


다른 사상가들과는 달리, 그리고 그들 모두로부터 자신을 제외하면서 공자는 자신이 개인적 경험으로 축적해놓았던 것에 의해서 눈이 멀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며, 길의 '총체성'에 다가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자는 그 무엇에도 반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에도, 자신의 반감에도, 사물의 시작에도 끝에도 반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존재자를 동시에 펼쳐 놓는다". 그들을 매번 "저울"(완전한 합치의 중용)과 "일치하게" 만듦으로써 그러하다. 그러므로 "사물의 모든 다양한 양상은 더 이상 서로 서로를 감추지 않는다". "저울은 그 길이다."」*


15/09/06 


* 프랑수아 줄리앙. (2009). 현자에게는 고정관념이 없다: 철학의 타자. (박치완 & 김용석, Trans.). 한울.


모험러의 책방

서평, 리뷰, 책 발췌, 낭독, 잡문 등을 남기는 온라인 책방. 유튜브 채널 '모험러의 책방'과 ′모험러의 어드벤처′(게임) 운영 중.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