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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회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누가 그것을 행동에 옮길 것인가를 상상하는 것이 어렵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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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회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누가 그것을 행동에 옮길 것인가를 상상하는 것이 어렵다

모험러

「공동선에 대한 물음은 우리 시대의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보다 나은 세계가 가능하다는 전망과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비전 없이는 현대 사회의 발전은 멈추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정치적 토론의 장에서 ‘좋은 사회’의 모델에 대한 사유와 논쟁이 더 이상 중요한 공적 의제로 설정되지 못하고 있는 현상은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또한 더욱 심각한 문제는 대안적인 세계가 불가능하다는 회의주의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이지요. 보편적이라고 할 수 없겠지만, 전 세계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에 동의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막상 ‘좋은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그려보려고 하면, 무엇이 문제 지점인지는 어느 정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의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여전히 묘연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생각하는 중대한 문제는 사람들이 상상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이죠. 우리 조상들이 수백, 수천 년 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갖가지 종류의 해결책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죠. 공동선이 실현된 좋은 사회를 상상하는 것은 누가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을지를 상상하는 것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쉬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사회’의 모습에 대한 논쟁이 과거의 열의와 활기를 대부분 잃게 된 것은 ‘주체의 위기(crisis of agency)’에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두고 “책임이 표류하고 있다”거나 “책임은 이제 주인을 잃어버렸다’ 등의 표현으로 노골적인 비판을 하기도 했죠. 다시 말해 ‘좋은 사회’의 모델에 대한 모색이 공적 의제에서 제외된 배경에는 좋은 사회를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가진 신뢰할 만한 주체가 없다는 불신이 자리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혹은 결정적으로 권력과 정치의 분리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여기서 ‘권력(power)’이란 ‘무엇인가를 행하는 능력’을 의미하며, ‘정치(politics)’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능력’을 의미하지요. 과거 수 세기 동안 국민국가의 제도 내에서 결합되어 있던 이 능력은 세계화를 거치면서 두 개의 다른 공간 속으로 분리되었습니다. 마뉴엘 카스텔(Manuel Castells)의 용어를 빌리자면, 권력과 정치는 ‘흐름의 공간(space of flows)'과 ’장소의 공간(space of places)’속에 각각 존재하게 된 것이지요.


다시 말해 대부분의 권력이 국민국가에서 초국가적이고 전 지구적인 공간으로 확산된 반면, 정치는 여전히 국가 영토 주권 내에 제한된 지역적 경계에 머물고 있지요. 그러므로 한편에는 정치적 감시와 통제로부터 벗어나 표류하고 있는 ‘권력’,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권력의 결핍에 부단히 시달리고 있는 ‘정치’가 공존하는 것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권력은 현 상태를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고, 정치는 개혁을 원하든 그렇지 않든 어떠한 변화에도 착수할 능력조차 갖고 있지 못한 상황입니다. 결국 주권국가의 수준에서 통합된 사회를 운영하기 위해 만들어진 지금의 정치적 집단들 중 그 어떤 것도 새롭게 요구되는 역할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미래의 과업은 차치하고, 현재의 과제가 갖는 무게와 크기를 감당할 능력도 없는 것이죠.」*


15/08/05


* 인디고 연구소(InK) 기획. (2014). 희망, 살아 있는 자의 의무: 지그문트 바우만 인터뷰. 서울: 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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