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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발전 ― 포기에서 변환으로, 변환에서 확대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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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발전 ― 포기에서 변환으로, 변환에서 확대로

모험러

「불교는 마하무드라 요가 탄트라와 선(禪) 또는 정토종에서 보는 것과 같은 대승불교의 실천 응용을 통하여 여러 세기 동안 발전하고 꽃을 피웠다. 그러나 정토종은 개인의 진화를 촉진하기 위해 극락에 태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으므로, 실제적인 불교의 가르침(즉 반야바라밀의 체험)은 선과 탄트라 요가에서만 찾을 수 있다. 역사가 입증하는 바에 따르면 이들 선과 탄트라 유파에서만 '눈을 뜬 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따라서 불성이 개화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수행자라면 이들 마하무드라와 선의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선과 탄트라 양쪽의 연구 및 실습을 통하여 필자는 선의 가르침과 마하무드라의 고급 탄트라가 동일함을 알았다. 식별할 수 있는 차이는 양자의 제시 방식이 표면적이고 외부적인 견지에서 약간 다르다는 점뿐이었다. 본질은 전적으로 같다. 그렇지만 이런 차이가 무엇이며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알아두는 것도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이를 위해 이제 대승불교 속에서 발전한 선과 마하무드라의 원리·수행법·양식을 검토하고, 불교 전반의 세 가지 두드러진 관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초기의 상좌부 내지 남방불교는 '철저한 포기'를 통해서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번뇌를 버리고 사성제를 얻었으며, 오온을 해체하여 아무것도 남지 않은 열반에 이르러 윤회를 근절하고 열반을 실현해야 했다.


그러나 대승불교 초기의 사고방식은 이와 달라서 '포기'보다 '변환'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번뇌는 포기하기보다는 깨달음으로 변환시켜야 했고, 사념은 윤회를 통과하여 열반을 향하도록 변환되었다. 여덟가지 의식은 4종 지혜를 이루도록 하나씩 승화시켜야 했으니, 다섯 감각은 성소작지로 바뀌었고, 여섯 번째 의식인 마음은 묘관찰지가 되었으며, 일곱 번째 의식은 평등성지로, 여덟 번째 의식인 아뢰야식은 대원경지로 되었다.


그러다가 대승불교 후기에 와서는 '동일시'와 '확대'의 원리가 들어섰으니 그에 따르면 번뇌가 곧 깨달음이고, 의식이 바로 지혜이며, 윤회가 곧 열반이었다. 의식은 최후의 각성 상태로 확대되었다. 이 후기 대승의 관점에 의하면 불성은 마음의 지식더미를 파괴함으로써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의 유한한 의식을 무한한 불심과 동일시함으로써 얻어진다. 그리하여 붓다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참으로 이상하구나, 내가 보기에 모든 창조물이 사실은 붓다이고 각성되어 있으니."


마하무드라와 선은 이런 관점에 근거한다. 선가에서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와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붓다가 한 콧구멍으로 숨을 쉰다."


선종의 제6조 혜능은 이렇게 말했다.


자성이 본디 삼신을 갖추었으니 그를 밝혀 사지(四智)를 이루리라 그리하여 눈과 귀를 닫음 없이 곧바로 불성을 얻으리라


마찬가지로 사라하(Saraha)의 도하(Do-Ha) 마하무드라는 이렇게 가르친다.


윤회와 열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나니

모든 현상과 느낌은 마음의 본성과 같노라

바다와 그 파도 사이에 구별이 없듯이

붓다들과 그 외의 유정(有情)이 다르지 않도다


마하무드라를 터득한 가르마파(Garmapa) 역시 이렇게 가르쳤다.


유정은 자신이 불성 속에 있을지라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윤회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누나


또한, 티벳에서 일상적으로 염송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나 스스로 깨닫게 되기를 스승께 기원하나이다

내마음이 법신이고, 내마음이 보신이며, 내마음이 응신임을


중국의 선과 티벳의 마하무드라를 대비시킨 간단한 문구가 있으니 선은 밀교적 마하무드라이고, 마하무드라는 현교적 선이라고 하는 것이다.」*


15/01/01


* 라마 카지 다와삼둡 번역, 에반스 웬츠 편집, <티벳 밀교 요가>에서 발췌, 편집,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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