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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그물' 이론가들은 통상 존재의 평등성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깨달음에 도달한 홀라키를 놓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개미와 원숭이 모두 '절대신성'의 완벽한 현현이므로 ― 실제로 그들은 그렇지요 ― 그들 사이에는 깊이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가장 골치 아픈 형태로 된 환원주의적 주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시대의 환경윤리학이 '영'의 현현으로서의 모든 홀론을 예외 없이 존중하기를 바라지만 또한 동시에 그 내재적 가치성에 대한 실용적 구분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원숭이보다는 바위를 걷어차는 게 훨씬 더 낫고 암소보다는 당근을 먹는 게 훨씬 더 낫고 포유동물보다는 곡물을 먹고 살아가는 쪽이 훨씬 더 낫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앞에서 말한 그러한 내용들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깊이에 있어서의 차등, 내재적 가치에 있어서의 차등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 즉 가치의 홀라키를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생태철학자들은 이러한 진술에 동의하고 있지만 그들은 왜 그런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계층구조를 부인하는 계층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평원적 생명의 그물망과 생명의 평등성만을 갖고 있는데, 이는 자가당착적 모순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생명유지를 위한) 실용적인 제반활동을 마비시키고 내재적 가치를 불구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 켄 윌버

예전에 <채식의 배신> 서평을 쓴 적이 있다. 저자 리어 키스는 말 그대로 극단적인 환원주의자였다. 식물도 고통을 느낀다면서, 인간을 포함해 생명들 사이의 차별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의 결론은 원시인들의 식습관으로 돌아가자였다. 이는 단순히 식습관의 변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연 속에서 서로 먹고 먹히는 원시인들의 문화체계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농사는 토지를 약탈하고 이 지구 상에 인간을 너무 많이 생산해내고 문명을 탄생시킨 원흉으로 비난받는다. 그 산물인 곡물도 덩달아 비난받는다. 수렵채집 생활로 돌아가자! 그녀가 보기에 원시인들의 세상이야말로 에덴동산이었던 것이다. 사실 그 서평 쓴 이후로 나온 추가 정보들에 의하면, 그녀가 건강이 악화된 것도 전혀 채식 때문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들 보다도 못한 최악의 식습관이 문제였던 게지.

그 서평은 사실 최대한 어조를 누그러뜨렸던 것이다. 초안은 훨씬 신랄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식의 생태주의자들에게 연대의식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의식과 이성의 출현 이전, 문명의 출현 이전, 투쟁하고 갈등하는 세속 바깥의 자연에 향수를 느끼는 낭만주의적 퇴행과 인류가 발전시켜온 윤리와 양심, 갈등과 협력, 옳음과 그름, 권리와 의무, 감성과 이성, 문화와 사회를 품에 안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초월을 분명하고 의식적으로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평소에 육식을 줄이는 정도의 편식을 한다. 앞으로도 나는 이 정도의 편식주의자로 남을 것 같다. 거기에 어떤 죄책감도 없다. 그러나 동시에 채식의 높은 가치에 대한 어떠한 의심도 없다. 

13/11/13

* 켄 윌버, <모든 것의 역사>에서 인용,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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